요10:1-21 / 생명의 길
성경을 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기르신다고 하는 목자로 묘사된 부분을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시23:1,2;시95:6-7 /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사40:10-11;.
무엇 때문에 주님께서 주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를 목장의 비유로 말씀하셨는가? 이는 진리의 목장이 되어야 할 예루살렘 성전의 지도자들이 양을 치는 목자가 아니라 도둑이요 강도 같은 일을 하며, 양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이 학대받는 실정을 보시고 주님 자신이야말로 참 선한 목자이심을 밝히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참으로 아름다운 하나의 전원시입니다. 구약의 유명한 시편 23장을 연상케합니다.
생명에 관하여
히브리어에서 생명이란 네페쉬(שׁ)라고 하는데, 생명은 창조자가 인간에게 그 호흡을 불어넣으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창2:7 /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따라서 שׁ의 의미에 있어서 호흡은 영이나 생명(살아 있음)의 의미와 서로 결속된 관계에 있다. שׁ의 생명의 의미는 호흡이나 영 이외에 피(담:ם)와도 연결된다. 왜냐하면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이다(신12:23 / 오직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아울러 먹지 못하리니). 생명의 의미인 שׁ는 열망, 갈망, 욕구의 뜻을 부가적으로 가지고 있다. שׁ의 욕구는 육적인 것(배고품과 목마름의 욕구) 외에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들이 있다(시42:1-2 /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이로볼 때 שׁ는 단순한 생명의 의미를 넘어선 영혼의 의미를 가지며 그 영혼은 바램과 소망과 갈망함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욕구를 가진다. 생명이 있는 자는 하나님을 갈망하도록 되어 있다. 구약의 네페쉬는 온전한 생명, 구원을 얻기 위해 육신의 양식만이 아니라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암8:11)을 찾아야 될 것을 암시한다.
희랍어에서는 조에(ξωή)라고 한다. ξωή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근거로 한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 죽었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다는 부활의 메시지이다(롬14:7 /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영원하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서 죽음의 세력은 박탈을 당한다. 그 속에서 인간의 주장은 예리하게 부정되며, 하나님의 새롭고 참된 생명의 역사는 은혜로운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롬5:17 /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이 은혜로운 구원의 역사가 아니면 우리는 멸망할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참 생명을 소유하는 길이 된다(요3:15-16). 예수님은 생명과 불멸을 밝히셨다(딤후1:9-10 /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섞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주님은 생명의 주이시며(행3:15), 부활인 영원한 생명이다(요11:25-26 /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참 목자 되신 그리스도(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ʾΑμήν ʾαμήν λέγω ʿυμΐν)” 이러한 표현은 주께서 중대한 말씀을 하시기 전에만 사용된 표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설교를 하시기 전에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란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이 받은 말씀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과 일맥 상통합니다. 즉 예수님은 ʾΑμήν을 사용하심으로 자신의 말씀에 대한 신적인 권위를 강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목장의 풍경을 서론적으로 말씀하시면서 참 목자와 거짓 목자가 있음을 시인하십니다. 양은 성경에서 약 500회 이상 언급되어 있으며 팔레스타인 지역을 대표할 만한 동물입니다. 또한 양은 유대인 사회에 있어서 주된 재산이요 생계의 수단이며 종교의식과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저녁이 될 때 양들을 우리 속에 몰아 넣어 그들을 보호하는데, 그 우리는 지붕까지 덮여진 건물의 형태가 아니라 야외에 진흙을 이겨 만든 벽돌이나 거친 돌로 주위를 돌아가며 울을 친 형태였다고 전합니다. 때때로 가시덤불 따위들을 사용하여 부분적으로 지붕을 덮기도 했으며, 또 가끔은 산에 잇는 동굴이 양의 우리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여러 명의 목자들이 자기네들의 양들을 우리에 몰아 넣으면, 문지기 한 사람에게 맡기고 이들은 이튿날 아침에 다시 와서 그 양들을 몰아내어 들로 나가서 목양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른 아침에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라고 말씀하시고 양의 문으로 들어가는 자만이 참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강도와 절도는 문이 아닌 다른 데로 넘어와서 담장이나 벽을 파괴하고 양들을 도둑질하거나, 아니면 아예 문지기를 죽여 버리고 강도질하여 양들을 앗아갑니다. 그러한 의미에 있어서 문으로 들어가는 자만이 양의 목자인 것입니다. 이는 정상적인 절차와 질서와 법에 이하여 제대로 활동하는 자가 목자이고 비정상적으로 문지기를 거치지 않고 들어가는 것은 불법이란 말씀입니다.
그러나 참 목자는 정상적으로 문지기가 열어 주는 문으로 들어가, 그가 키우는 사랑하는 양들을 하나 하나 이름을 불러 가며 인도하여 내고, 앞장서서 초장을 향하여 걸어가면 그의 목소리를 듣고 양들이 따라가, 푸른 초장에서 꼴을 뜯기도 하고 쉴 만한 물가에서 생수를 마시며 평강이 넘치는 생활을 하도록 합니다. 한 스코틀랜드인이 성지를 유람하다가 저녁에 양들을 몰고 오는 목자들을 만나서 시험삼아 목자의 옷과 자기의 옷을 바꿔입고 양들을 불러 보았으나 따라오지 않았고, 남의 옷을 입은 목자가 양을 부르니 당장에 따라 왔다고 합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참 목자이신 그리스도 그분은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집에서 기르는 짐승들에게 그 짐승의 모습이나 색깔, 특징 등에 따라 각각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가축들의 이름은 호칭의 수단을 뿐만 아니라 소유 관계를 나타내는 수단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주님은 우리을 찾으시는 하나님이시요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이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후 죄악의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때 주님은 부르셨습니다(창3:8-9 /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그리고 생명의 길인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분명하게 보이셨습니다(3:15 /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희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아담과 하와가 이 길로 달려갔는지, 아니면 영원히 주님의 낯을 피해서 살았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 분명하게 주님은 그들을 찾으셨고, 생명의 길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신약에서도 주님은 인생들을 애타게 찾으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됩니다. 눅15장 서두에 보면 모든 세리와 죄인들로 구성된 청중들 앞에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읽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아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잃은 양을 찾으시는 참 목자 그분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고, 그 귀한 한 영혼 한 영혼을 찾으시고 불러 인도하시는 참 목자되십니다. 이번의 수련회를 통하여 우리가 회개의 길로 나와서 진리를 발견하여 죄악으로부터 벗어났다면 주님은 잃은 양을 찾고 즐거워 그 벗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나와 함께 즐기자’고 외친 목자와 같이 하나님의 사자 앞에 기쁨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사역을 하다가 지쳐 심한 낙심과 좌절의 험난한 벽에 부딪쳤을 때 주님은 그 상함과 아픔을 보시고 그 자리에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히4:14-16 /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니시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흉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의 심령을 누가 알아줍니까? 우리의 고통을 누가 알아주십니까? 우리 안에 성령으로 와 계신 주님 오직 생명의 목자, 참 목자 되신 주님만이 알아줍니다(롬8:26-27 /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듯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이 있기에 그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의 집이라고 믿는 교회 앞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그곳에 목자의 음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우리를 부르시고 찾으시는 주님의 음성이 선포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의 양의 이름을 불러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주님은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4-5)
참 목자 되신 주님은 앞서가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음성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따라오는 양들은 그의 음성을 분별하는 존재들입니다. 주님은 우리 앞에 가심으로 우리의 참 선생이 되십니다. 또한 우리가 그분을 따라가므로 우리 역시 그분의 제자입니다. 선생으로서 주님은 사랑의 본을 보이시기 위하여 친히 대야에 물을 떠가지고는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주님은 선생으로서 우리에게 사랑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의 행적을 요한은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앞에 앞서가신 참 목자, 참 생명 그분은 넘치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사랑의 길라잡이(길을 인도하는 사람)로서 앞서 가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추상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이 주면 받고자 하는 이기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내어 주는 사랑이요, 보이신 구체적인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난 것이고, 그 사랑은 인생에 생명의 빛입니다(요1:4 /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앞서가시는 주님의 음성은 변화시키는 음성입니다. 이 음성을 분별하여 듣는 자들은 비진리를 따르지 않고 오직 주님의 음성으로 성숙한 변화를 이루어 갑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주님은 토기장이 되십니다(사64:8-9 /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자 주의 백성이니이다). 이 사회가 왜 이리 죄악의 수렁텅이로 빠져들고 있는가? 온 세계가 왜 이다지도 성의 노예로 전락되어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 안에서 힘겨운 죄악의 갈등이 왜 존재하며 죄악의 달콤한 유혹에 그다지 오래 머물고자 하는가? 우리 공동체는 왜 이다지도 성숙한 변화의 은총이 없는가? 그 이유는 주님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오는 병리 현상들입니다. 이 사회가 이 나라와 온 세계가 주님을 인정하여 죄악을 떨쳐 버린다면 주님을 영접하기만 한다면 성숙한 변화의 신바람, 성령의 바람이 홍해를 가른 동풍과 같이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변화의 역사들을 일 땅에 일구어 내고야 말 것입니다. 이것은 환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도의 비전이요, 주의 백성들을 가지고 살아가야 소망입니다.
최근 ‘두뇌한국(BK21)’이란 교육부의 계획이 세간에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두뇌한국21’은 교육부가 세계 수준의 대학원과 지역 우수 대학 육성을 위해 해마다 2000억원씩 7년간 모두 1조4000역원의 신규 예산을 투입한다고 합니다. 우리 예수 공동체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 가지시는 예수님의 이상은 교육부가 제시한 것과 같은 한시적인 이상이 아닙니다. ‘세상 끝날까지 이며 더 나아가 세상 저 너머 영원한 세계를 향한 이상’입니다(사11:6-9 /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인정하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우리는 우리 믿음의 공동체가 온전히 성숙되기 위하여 새로 맞이하는 2000년에도 ‘Brain church 21'의 아름다운 주님의 이상을 가슴에 안고 주님의 음성을 따르는 백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토기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나를 우리를 그 세상 중에 있게 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거하는 이 세계를 아름다운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생명의 문이신 그리스도(7-10)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에게 재차 강조하여 말씀하십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양들이 참 자유와 평강과 윤택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유일한 생명의 길이요 통로인 예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의 주제 성구인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의 말씀과 통하는 진리입니다.
양의 문으로서 주님은 양들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방법’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주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기도를 할 때도 주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요16:24 /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인생을 살아갈 때도 주의 이름으로 가야 합니다(행3:6 /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이 말씀은 한낱 앉은뱅이 된 자에게 이른 말로만 볼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도 이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왜입니까? 주님은 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길로 나아가는 자들만이 생명이 보장됩니다. 도한 우리는 그 어떠한 일을 함에 있어서도 주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골3:16-17 /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사도들은 주의 이름으로 능욕 받는 것을 너무너무 행복해 하였습니다(행5:40-41 /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벧전4:14 /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6 / 만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이러한 일들을 감당해 나아갈 때 우리에게 있는 생명이 풍성하게 자라게 될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에게 오신 그리스도 그분은 생명의 문입니다. 그 문으로 들어가며 나오는 자들은 생명의 충일한 은총이 넘실거릴 것입니다.
선한 생명의 목자(11-18)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이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에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주님은 본문을 통하여 이제부터 본격적인 당신을 증언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53장에 대한 신약적 의의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주님의 사랑과 양들을 위한 주님의 희생에 대하여, 또한 유대인들뿐 아니라, 세계의 온갖 민족의 구주 되심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11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이와 동일한 말씀이 14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고 반복하여 강조하십니다. 이 말씀은 주께서 양들을 위하여 속죄의 죽음을 죽어 주실 것을 뜻하는 동시에 생명을 걸고 양들을 보호하고, 양육하며, 인도하시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실 것을 뜻하는 이중적인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역사상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모든 거짓된 지도자들(제사장들, 거짓 선지자들, 관원들, 왕등)은 이스라엘에게 실망만 안겨 주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 지도자들도 이스라엘에게 참 목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고(6 / 예수께서 이 비유로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19-21 /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그들이 중심이 되어 주님의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던 것입니다(고전2:8 /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은 양떼를 먹이는 데에 실패했고, 양떼들을 지혜롭게 인도하지 않았으며, 양떼를 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주님 말씀에 나타난 삯군에 가까웠고, 이리와 같이 늑탈하는 것에 혈안 되었던 무리들입니다. 이러한 무리들을 향하여 주님은 마23장에 기록된 대로 집중적으로 공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지도자들 밑에서 도탄(塗炭 / 몹시 곤궁함)에 빠져 있는 백성들에게 겔34장을 통하여 한 줄기 소망의 빛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소망의 빛 때문에 타락한 지도자들 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망이 없었습니다. 그 가슴속에는 분명히 오실 이상적인 목자에 대한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겔34: 23 /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고 하신 약속이였습니다.
그 약속하신 분은 오늘 본문에 선한 목자로 당신을 이미지화 시켰습니다. 세상에서는 양들이 목자를 위하여 있으나, 일단 하나님의 세계, 곧 주님의 교회 안에 들어오면 그 관계가 ‘목자가 양들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바로 이것을 말씀하시려고 이 비유를 드신 것입니다. 성지에서 양을 치는 목자 한 사람에게 지나가던 사람이 묻기를 ‘당신은 당신의 양을 얼만큼 압니까?’하자 그는 ‘제 눈을 가리우고 양을 한번만 만져 보아도 내 양인지 아닌지 압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14-15 /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주님은 우리 모두를 잘 아실 뿐만 아니라 양들을 위하여 생명을 내어 주시는 사랑의 목자이십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부끄러움은 바로 우리들을 위한 희생이셨습니다(히12:2 /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골1:20 /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그리고 그분의 희생의 피는 가뭄으로 인하여 타 들어가는 메마른 대지 위에 쏟아지는 생명의 빗줄기와 같이 생명을 탄생시키는 생수의 강입니다. 아합이 하나님에게 범죄 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3년 6개월 동안 가뭄에 허덕이였습니다. 그 때에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 바람이 일어 하늘에서 큰비가 내려 죽었던 이스라엘의 대지를 적신 것과 같이 주님이 흘리신 생명의 피는 양들에게 있어서 생명의 단비가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우리 중에 아직도 주님의 공동체에 들지 아니한 백성들이 있습니까? 주님의 희생을 받으십시요, 그리하면 주의 음성을 듣고 주님의 사랑을 받아 한 무리가 되어 선한 생명의 목자에게 있게 될 것입니다.
참 생명의 목자는 우리들을 지키십니다. 다윗은 목동이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양들을 열심으로 지킨 성실한 목자였습니다(삼상17:34-35 /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주였나이다).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한 것은 바로 자기가 양들에게 가졌던 열심으로 지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현실의 삶 속에서 우리들을 지키십니다. 다윗이 목동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목자 되심을 발견할 것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떠나 계시지 않습니다(행17:27 /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렘23:23-224 /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다윗이 그의 양떼들을 곰과 사자의 발톱에서 지킨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양된 우리들(겔34:31)을 이 마지막 때에 지키실 것입니다(벧전5:8-8 / 너희 염려는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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