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설교본문

눅13:1-9 / 회개의 길

아론33 2009. 3. 16. 16:58

 눅13:1-9 / 회개의 길


  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 덞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땅만 버리느냐  8.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본문은 전체적으로 회개를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의 기록은 모두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반성하게 하는 충격적인 사건들입니다.  한 사건은 두어 사람에 의해 갈릴리 사람들이 신전에서 희생의 제사를 올리는데 갑자기 총독 빌라도의 명령에 의하여 참혹하게 살해를 당했다는 사건이였습니다. 또 한 사건은 실로암이라는 못물을 이용하려는 수도 공사를 하다가 망대가 무너져서 일하던 노동자 18명이 치어 죽었다는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사건에서 모두 죽은 사람이 산 사람들보다 특별히 죄가 더 있었기 때문에 참혹한 사건을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살아 있는 이유가 결코 죄가 없거나 죄가 가볍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시고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 불운의 사람과 같이 망하리라는 말씀을 통하여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의 뜻은 다음에 나타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하여 세 번의 강조를 통하여 회개의 중요성을 명백하게 드러냅니다. 


    회개에 대한 언어적인 이해


  회개는 과거 자신의 삶을 지배하던 죄로부터 돌이키는 행위와 세상을 향하여 살던 삶의 방향을 전환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신앙이란 두 가지 요소를 동시에 포괄합니다.  따라서 회개을 나타내는 용어도 당연히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회개를 나타내는 용어로 구약에서는 나함(ם󰖏�󰗺�)으로 원래의 의미는 ‘한숨을 쉬다’이나 실제로는 ‘미안해 하다(be sorry)', '자신을 달래다(console oneself)', '후회하다(repent)'라는 뜻으로 주로 사용됩니다(렘8:6).  이 용어는 과거 자신의 죄악된 행위를 돌이켜보고 후회하면서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측면을 강조하는 용어입니다.  다음으로는 슈브(בוּשׁ)로 ’뒤로 돌아서다(turn back)', ‘돌아오다(return)'라는 뜻으로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떠나갔던 죄악의 길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구약에서 회개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 이 단어는 신앙의 측면을 강조하는 용어입니다(시51:13;사6:10;렘3:22).

  신약에서는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로 이 단어는 ‘후에(after)'라는 뜻의 ’메타(μετά)와  ‘마음’이라는 뜻의 ‘누스(νοΰς)’의 합성어입니다.  그리고 νοΰς는 ‘알다’라는 뜻의 ‘기노스코(γίνωσκω)’와 관련된 단어입니다.  이는 중생 이후에 얻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변하고 따라서 지금까지의 삶의 행적을 후회하며 장차 행동을 변화하겠다는 회개의 행위적인 의지를 나타냅니다. 신약에서는 이 단어가 ‘회개(repentance)’로 번역되었다(행8:22;고후7:10).  그리고 에피스트로페(ʾεπιστροφή)라는 단어가 있는 데, 히브리어 ‘בוּשׁ’와 동일한 의미로서 단순한 마음의 변화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전환하여 새 삶을 살아가는 행동까지 가리키는 신앙의 측면을 강조하는 용어입니다.  이 단어가 신약에서는 주로 ‘돌이키다’(마13:15;눅22:32)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란 단순히 심적인 측면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태도가 근본적으로 변화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전한 회개의 메시지는 모든 생활이 변화되어 그 삶속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입니다(눅6:46-49 /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초를 반석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히되 잘 지은 연고로 능히 요동케 못하였거니와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주초 없이 흙 위에 집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히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갈릴리 사람들을 통한 회개의 교훈(1-3)


  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  피를 섞은 일의 정황을 보아서 갈릴리 사람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다가 빌라도에 의해 살해되어 그들의 피가 희생 제물과 섞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갈릴리 사람들은 격하기 쉬운 사람들로서 반란과 폭동이 잦았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무자비한 탄압 정책을 폈다고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이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에 의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어떤 유월절에는 삼천명의 유대인을 학살하여 그들의 시체가 성전 뜰에 가득하였고, 다른 유월절에는 이만명의 유대인이 학살을 당하였다고 전합니다.  

  이 사건이 언제 어떠한 방식으로 발생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주석가들 중에는 행5:37 /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훝어졌느니라는 기록을 참고하여 볼 때 갈릴리 사람들이 빌라도의 권위를 대향하다가 이런 참변을 당한 것이 아닌가 짐작하는 사람도 있고, 눅23:12 /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는 친구가 되니라는 기록을 기초로 헤롯이 갈릴리 사람들을 충동해서 빌라도에게 반기를 들다가 이런 봉변을 당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바대로 분명한 것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섞은 제물로 빌라도가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과, 로마의 폭정에 갈릴리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다는 사실이 두어 사람의 보고에 의해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이 사건을 보고한 사람들은 이 사건을 하나님의 진노로 생각했다는 것만이 확실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이 두어 사람과 더불어 대부분 유대인들의 관념 속에 있는 죄관은 예고치 않는 재난을 죄에 대한 대가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인과론적인 형벌관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불행한 일을 겪는 것은 모두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욥4:7;요9:2).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의도를 간파하셨으며 질문에 대하여 직접 대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의 잘못된 형벌관을 지적하시면서 만약 누구든지 회개치 않으면 이러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시면서 보고를 들은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심으로 그릇된 죄관을 수정하시고 계십니다.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 나타난 현상인 재난이 인과응보적인 죄의 형벌을 보인 것이 아니라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나 그 죽음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자기들의 죄 없음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나 모두 동일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직 불의의 재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도 안심할 수 없으며 동일한 불행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하시기를 ‘너희도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는 말씀으로 갈릴리 사람들의 죽음이 바로 죄때문이라는 지적에 대하여 오히려 회개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회개(μετανοέω)’는 지난날을 돌아보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잘못된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것까지도 포함하는 지속적인 회개를 강조한 말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에게 시급히 요청되는 ‘회개’는 이웃이 당하는 불행을 보고 위로해 주고 함께 아파해주지는 못할 망정 도리어 정죄하는 신앙의 태도를 버리는 것이면서 동시에 더 나아가 자기들도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마7:1-5, 롬3:10-12).  본문에 언급된 ‘망한다’는 말씀은 어떤 주석가들은 A.D.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대학살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주장과 인류 모두에게 임할 마지막 심판을 가리킨다는 주장이 있는데, 모든 인류가 예수님의 재림 시에 누구나 심판 받는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후자의 견해가 합당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만일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회개는 인간의 운명과 직결됩니다. 개인도 그러하고 민족도 그러합니다.  회개하면 살고 그렇지 못하면 망합니다.  이로볼 때 회개는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 말씀은 변화에 초점을 맟추신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신앙생활에 있어서 낡은 사고방식을 버리지 아니하고 정체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낡은 신앙을 청산하기 위하여 우리는 부단히 모이고 그 모임 속에서 회개의 메시지를 통하여 변화를 받아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로 거듭나야 합니다.  성경은 신앙생활함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독선과 개인주의적인 신앙의 형태를 단호하게 부정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모이는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행2:46-47, 히10:25).  그 모임 속에 주어지는 주님의 말씀으로 날마다 본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청중들과 같이 잘못된 죄관(인생관, 경제관, 미래관, 신앙관)을 수정받고 주님 앞에 일신(一新 / 아주 새로워짐)함으로 일신(日新 / 날로 새로워짐)하는 신앙인이 될때 회개한 자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과 연단 가운데 던지시는 것은 우리가 주의 말씀의 계명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를 보시기 위함입니다(출15:22-26).


  이러한 정신은 구약의 예언자들에게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사람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켜 회개하며 더 이상 범죄하지 아니하고 의를 행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사 지난날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을 무수하게 강조했습니다.  겔33:19 / 만일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 법과 의대로 행하면 그가 그로 인하여 살리라  욘3:10 /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죽은 행실을 버리고 주님 앞에 돌아가기를 소원하는 결단하는 이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로써 죄에 대하여 살았던 생활에서 죄에 대하여서는 죽고 의에 대하여서는 죽었던 인생에서 의에 대하여는 사는 신앙(벧전2:24-25)의 사람들 믿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 되TU서 세례 요한과 같이 요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신앙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회개에 소극적이였던 사람들과 적극적인 사람들


  -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음란과 방탕을 일삼았고 그들의 모든 계획은 항상 악할 뿐이었습니다(창6:5-6).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노아를 시켜 심판을 경고하였고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벧전3:20 /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은 얻는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벧후2:5 /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그러나 노아의 전파는 우이독경(牛耳讀經)이였으며, 결국 그 기회에 회개치 않았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물을 통하여 심판하심을 통하여 쓸어버렸습니다.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가 지나가자 울부짖을 시간과 장소도 없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어떠합니까?  그들은 분명히 노아의 홍수에 관한 기사를 들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그들에게 하나의 거울이 됩니다.  즉 자신들의 잘잘못의 시비를 가릴 수 있는 귀한 사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역사적인 사건에 관하여 그다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의인 열 명이 없으므로 모두가 불에 망하는 비참한 사람들이 되였습니다(유7 /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역사(과거)는 비젼을 제시하는 훌륭한 재료라고 말하였습니다.   신앙생활도 똑 같습니다.  노아 시대에 처해 있던 사람들과 소돔과 고모라의 사건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참혹한 사건은 모두가 회개의 중요성을 암시적으로 깨닫게 하는 역사적인 구절들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내려진 이 놀라운 심판을 몇 천년전의 사실로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마24:37-39). 오늘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개인이나 교회 그리고 국가에 있는 죄악들 모두를 두고 연대적인 책임 의식을 가지면서 회개해야 합니다(느1:4-7, 9:1-5). 

  십자가 위의 강도는 자기의 죄값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그 대가를 당연한 것으로 알고 회개하여 주님께 자비를 구하여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강도는 자기의 죄가를 전연 알지 못했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비방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를 모실 기회가 있었지만 그는 구원의 기회를 잃고 멸망의 세계로 들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눅23:39-43). 


  우리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회개는 고집으로 인한 고립에서 하나님에게 돌아오는 일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을 심판자 - 그 앞에서 인간은 범죄 했고 그의 용서에 의해서만 인간은 단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로 복귀할 수 있는데 - 로서 승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하나님의 판정에 승복하는 일이고 그렇게 때문에 자기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겸손히 무릎을 꿇고 나오는 것으로 가장 아름다운 일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눅15:3-7).


    실로암 망대를 통한 회개의 교훈(4,5)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 덞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


  - 이 사건 역시 역사적 사실로 지적하기는 어려운 사건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빌라도의 실로암 수도 공사에 종사하다가 사고로 죽은 사건은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말씀하신 것을 재차 강조하기 위하여 ‘재난과 죄’의 관계에 관한 또 하나의 예를 들고 계십니다.  여기서 실로암(Siloam)은 예루살렘 남쪽과 동쪽 성벽에 접해 있었고 기혼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공급되는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였습니다.  본문에서 말해 주는 사건은, 이곳을 지키기 위해 세워 놓은 망대가 무너졌다는 것이며 그 사건으로 열 여덟 명의 생명이 죽음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언제나 죄와 수난을 엄격히 연관지어 생각해 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에 의해 학살당한 갈릴리 사람들이나 예루살렘에서 죽은 그 열 여덟 사람들이 죄의 대가를 받은 것이라고 유대인들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체적인 사례(예수님과 청중들이 알고 있는 사건)를 들어가며 그것을 부인하고 계십니다.  즉 학살당한 갈릴리 사람이나 예루살렘에서 죽은 그 열 여덟 사람이 결코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더 있어서 수난을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회개치 않는 사람은 누구나 이들처럼 결국 멸망하고 만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주후70년 로마의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 멸망당할 것을 예언한 것(34)이요, 영적으로는 회개치 아니하면 모든 인간은 전부 영원한 죽음과 멸망의 수난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코 다른 사람들보다 갈릴리 사람이나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열 여 덞 사람이 죄가 더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도 회개하지 않을 경우는 이와 같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란 말씀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이러한 유의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습니다.  1994년 10월 21에 일어난 사건으로 동아건설이 1979년에 준공한 성수대교가 15년만에 붕괴 되였습니다.  성수대교의 붕괴를 놓고 어떠한 사람들은 사회의 병리 현상과 공무원들의 부패가 낳은 참사다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무고한 시민과 많은 학생들이 그 사고로 인하여 죽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입각하여 생각한다면 “성수대교가 무너져 죽은 많은 사람들이 오늘 이 자리에 사는 사람들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말하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망합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 죄인이란 강도질을 하거나 살인은 하는 등 사회적인 법을 위반한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아담의 후예인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신의 뜻대로 살려는 죄의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죄의 본성에 의해서 얽히고 설혀 풀 수 없는 실타레와 같이 죄의 원인과 결과들 앞에 무감각한 삶을 살아갈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그러한 삶을 청산하라고 갈릴리 사람들의 비극과 실로암 망대의 비유를 통하여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회개는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자존심을 내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서 은혜 받은 자로서의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회개가 없이는 변화가 없습니다. 회개가 없이는 소망과 비전은 우리에게 꿈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망상을 가져다줍니다. 


  과거를 회개하는 데에 우리들에게 좋은 본은 보여준 예로 한 경직 목사님의 경우를 들 수 있습니다.  목사님은 1992년에 Templeton Prize을 받았습니다. 템플턴상은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것으로 상금이 무려 8억원에 달하는 명예로운 상입니다. 이러한 귀한 상을 한 경직 목사님이 받게 된 일은 한국 교회의 자랑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수상을 축하하는 모임에서 뜻밖의 발언을 하여 참석자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바로 일제하에서 신사 참배했던 일에 대한 참회의 발언이였습니다.  1992년 6월 18일의 여의도 63빌딩에서 그 날 한 목사님이 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신사 참배를 했습니다. 나는 이 상을 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 상은 결코 나 개인에게 준 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영략교회에 준 상이고 한국 교회에 준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목사님은 1942년에 범했던 과오를 50년이 지난 1992년 공석에서 고백하고 그 과오를 돌이켜 시인한다는 것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의 신앙과 인격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교회가 회개하여 바로 서지 않는 다면 어떠한 사람들에게 회개를 요청하겠습니까?  바로 우리들이 오늘 이 자리에서 회개함으로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과 잘못된 자존심을 내어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바른 예수 공동체, 성경 위에서는 예수 공동체, 본이 되는 예수 공동체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으로 과원지기의 결연한 회개를 통하여 진정한 목적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포도원의 무화과나무를 통한 회개의 교훈(6-9)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땅만 버리느냐  8.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앞부분에서는 회개하지 않을 때 내려지는 심판이 강조되었는데 여기서부터 이어지는 비유에는 하나님께서 인내하시는 동안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말씀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는 일이 흔치 않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주인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은 그 나무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보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주인은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고 삼년을 기다렸다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나무를 심은 때로부터 3년이 아니라 열매를 맺을 만한 때로부터 3년이란 뜻입니다. 즉 열매를 기대하고 온 뒤로 3년을 말합니다.  주인은 깊은 인내로 3년을 계속하여 참아 왔으나 여전히 열매는 없었습니다. 무화과나무에서 주인은 열매를 구했으나 기대에 어긋나게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내에도 불구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 성도, 바로 우리를 가르칩니다.  결과가 이렇게 나타나자 주인은 그 나무를 찍어 버리라는 명령과 함께 땅만 버린다는 책망을 과원지기에게 내립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는 두 가지 측면에서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과실수가 과실을 맺지 못하므로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상실했으며, 다른 하나는 쓸데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어서 땅만 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이 쓸모 없는 무화과나무를 찍어 버리라는 명령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찍어 버림’은 그 시대에 주어지는 하나의 징벌의 수준이 아니라 영원한 파멸을 뜻한다고 보아야 하며 하나님의 인내가 끝날 때 가해지는 심판의 최후성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시간까지 인내하시고 계십니다.  이제 인내의 한계가 과원지기에서 말씀하심을 통하여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과원지기는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여기에서 과원지기의 간구하는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적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마치 멸망 받아야 할 소돔 성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올렸던 아브라함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것(창18:22-32)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과원지기는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적절히 맺힐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노라’고 주인에게 간구합니다. 예수님은 성도를 위해서 어떠한 방법으로  두루 파시고 거름을 주십니까? 그것은 성도를 위해서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앞을 가리지 못했던 베드로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간구하셨습니다.  눅22:31-32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이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또한 믿는 자들을 위해서 예수님은 요17:15-17 /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로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라고 간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열매입니다.  무화과 나무에서 바라볼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무화과나무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꽃이 없이 맺는 열매입니다.  주인이 무화과나무에서 바란 것은 잎이 무성한 것(신앙의 경력)이 아닌 또한 화사하고 아름다운 꽃(신양의 배경)이 아닌 오직 열매이였으나 그 열매가 나타나지 않자 찍어 버리기로 결심했다고 하였습니다.  열매 없는 나무, 무용한 나무는 언제나 그대로 둘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를 무화과나무로 비유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존재였습니까?  고전1:26 /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우리는 이 말씀대로 육체적으로 영향력이 없던 자들이였습니다.  학적으로도 그다지 권위도 없는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수고하신 희생의 피로 값주어 사셨습니다(엡1;7, 2:13;벧전1:2,19;요일1:7;계1:5,5:9,7:14;히9:22). 이렇게 우리를 수고하신 예수 그리스도 아무 가치 없는 인생을 위해서 십자가의 진한 사랑의 수고로 우리를 위해서 수고하신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를 새롭게 하실 영원한 구세주이십니다.  그분의 수고를 받아들이는 것이 회개의 길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있지 아니하면 땅만 버리는 자리만 차지하는 성도라는 이름만 사용하는 죽은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앞에 구해야 합니다. 주님 나를 위해서 수고하셨으니 그 수고가 헛되이 되지 않도록 나를 붙들어 주옵소서.  

  회개의 열매가 없이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무딘 심령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눅3:7-9에서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이러한 경고를 들은 유대인들은 되묻습니다.  우리가 무엇을하리이까?  이 물음에 요한은 답하기를 11-14 /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군병들도 물로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이와 같이 회개는 구체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 열매를 위해서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그렇기 대문에 참된 회개의 길은 오직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 주님은 정녕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흠없는 어린양의 피로 나를 씻어 주옵소서.   이러한 고백을 위해서 세례요한을 주님이 지나가실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요1:29 /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떠한 죄들을 주님 앞에 고백해야 합니까?  우리의 숨은 죄요 우리가 은폐하고 있는 죄들입니다. 이에 덧붙여서 우리의 고범죄들을 회개해야 합니다.  유대인들과 같이 나는 모태신앙인이기 때문에 신앙의 경륜이 나를 구원자로 세울 것이라는 구원의 허수를 버려야 합니다(마3:9 /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숨은 죄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죄악입니다.  이 죄는 우리의 의식 속에서 깊이 잠자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은혜 받았노라고, 승리하였노라고 마음속에서 자만하면 언제든지 승승장부하여 나타나는 죄악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승승장부하였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깃들어 있던 음란의 정욕을 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급기야는 간음하는 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깨닫지 못하는 죄악을 나단은 비유를 통하여 지적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삼하12:14 / 이 일로 인하여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의 낳은 아이가 정녕 죽으리이다.     시19:2-13 / 자기 허물을 능히 꺠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를 짖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은폐된 죄악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지각으로 의식하지 못했던 죄악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에 특심함으로 믿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하였으나 주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기를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말씀을 듣고 그의  행로를 바꾸었습니다.  그 즉시로 올바른 회개를 이룬 것입니다.  이 회개를 이룬 후에  그는 어떠한 언어로 자기의 죄된 생활을 회생합니까?  딤전1:15 /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자기의 무지로 가리워졌던 죄악이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증거되자 그는 행로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은폐된 죄악이 그 얼마나 흉직한 것이었던가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주님의 회개의 교훈에 대하여 가슴 깊이 새기고 주님 나는 아직도 내 안에 숨은 허물이 있습니다. 주님 아직도 나는 연약하기에 나의 지작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죄악이 있사오니 나의 무지함을 밝히시사 그리스도를 알게하옵소서. 나를 고쳐 주소서. 나를 변화시켜 주옵소서 외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변화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임합니다.  내게 회개의 열매를 주시지 않으시면 나는 망합니다.  주님 함께 하여 주옵소서.


    히7:24-25 /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가는 자들은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 구하심이니라.


    잠1:23 /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신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나의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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