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8:31-32 / 진리의 길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주께서 주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의도가 어디 계셨는가? 그들을 주께서 적극적 신앙의 단계로 이끄시기 위한 것입니다. 초보적 단계의 신앙의 단계에서 주님의 말씀으로 전 인격적인 결단을 내리고 본격적인 신앙 단계에까지 올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반역으로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면서부터 사람들은 그 마음은 사단의 궤계로 말미암아 마비가 되여 심히 왜곡되었으며, 영안이 어두워져서 진리를 알지 못하게 되었고 사단의 노예로 전락되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그 죄악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죄악의 짐 밑에서 신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께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으로 십자가를 취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늘 나라에 올라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우리들의 눈과 마음에서 무지와 죄의 비늘이 벗겨져서 진리를 알게 되고, 자유을 얻게 되어 거듭날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와 자유는 인간이 존재한 이후에 추구한 가장 고귀한 개념입니다. 진리를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 이는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던 날부터 지혜를 찾는 뜻있는 사람과 정의의 투사들이 표방하던 최고의 이념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전쟁의 목적을 자유 수호에 둔다고 하면서 그 자유의 내용을 네 가지로 설명하였습니다. ①. 양심과 사상의 자유 ②. 결사, 집회, 언론, 출판, 행동의 자유 ③. 공포에서의 자유 ④. 빈곤의 자유였습니다. 그러나 대전이 끝나자 이 자유는 온전히 구현되지 않았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인간이 그토록 추구하고 있는 자유는 어떠한 유명한 정치인의 정치적인 역량과 약속을 통하여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에 대한 욕구는 인간성의 가장 깊은 곳에서 폭발하여 나오는 생의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유형적, 무형적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나기를 열망합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달라”고 한 미국의 개척자 페트릭 헨리가 부르짖은 이 내용은 영국 압제 하에서 미국의 독립을 외친 소리이기도 하였지만 이는 자유를 상실한 인간들의 가장 심각한 외침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자유는 인간의 존재에 있어서 요구되어지는 기본적인 구성 요소입니다. 자유 없는 곳에 생은 물론 역사도, 문화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역사의 페이지를 넘겨보면 정의의 투사들은 한결같이 자유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고 싸우기를 주저하지 아니했음을 찾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민주 국가 치고 모두가 다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약속하지 않은 나라는 지구상에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도 사람들의 자유에 대한 욕구를 억누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자유하도록 지은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자유는 혁명이나, 조직체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이 말씀하신 바대로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진리를 통한 자유입니다. 즉 진리가 가져다준 이정표는 자유라는 종착역입니다. 우리가 만일 주의 진리 위에 서 있다면 우리를 지배할 그 어떠한 권위도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최고의 권위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교권(종교상의 권위)보다 강합니다. 진리는 무기보다 강합니다. 진리는 정연한 논리보다도 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는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허락합니다. 이 자유는 정치에서 얻은 자유, 사회 운동에서 얻은 자유, 박수 갈채 인기에서 얻은 그 어떠한 자유보다도 진리를 통하여 얻은 자유보다 클 수는 없습니다.
진리에 관하여
예수님을 재판하던 총독 빌라도는 진리의 참 실체되신 주님 앞에서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진리란 말은 구약의 히브리어에서는 ‘에메트(ת)’로 확신한다는 동사 아만(ןאָ)에서 온 명사입니다. ת는 변함없는 확고부동한 진리로서 믿음 위에 기반을 둔 것입니다. 또한 ת는 정의, 공의, 선, 성실, 신실, 인애, 자비 등의 용어들과 동의 어적 관계에 있으며 이들 용어의 의미들을 포괄하며, 이 용어는 구약에서 행함과 관계합니다. 즉 ‘진실을 말하다, 주 앞에서 진실로 행하다, 진실하게 대우하다, 진실을 베푸시다’등의 표현에 집중적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삶에 있어서 ת는 사람들 사이의 이상적인 관계 형성의 조건이며, 왕의 필수적인 방패입니다(잠20:28 / 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하고 그 위도 인자함으로 말미암아 견고하니라). 이러한 행함과 삶에 있어서 이상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하는 진리의 근원은 여호와 하나님이요(시31:5 /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구속하셨나이다), 그의 말씀이며, 계명입니다.(시119:142 / 주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 ת는 무엇보다도 재판, 심판의 상황에서도 가장 본질적인 척도입니다.
신약에서 희랍어로 알레데이아(ʾαλήθεια)로서 진리, 진실이란 말이다. 헬라와 헬레니즘의 세계에서 ʾαλήθεια는 어원적으로 ‘숨기지 않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나타나 보여진 것, 드러난 것, 열려진 것, 실제의 참 모습 등을 의미한다. 초대 기독교 세계에서 ʾαλήθεια는 영원이나 생명 등의 영적 개념들과 깊이 관계하고 있다. 요14:6에서도 길과, 진리, 생명이 한 선상에서 나오는데, 복음의 진리는 믿는 자들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줍니다(요6:68 /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리이까). 그러므로 ʾαλήθεια는 거짓, 불의, 썩어짐, 부패와 완전히 반대편에 있습니다(롬1:18 / 하나님의 진노가 불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딤전6:3-6 /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그러나 지족(知足 / 분수를 지켜 만족할 줄 앎)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유익이 되느니라). 반면에 진리는 의, 거룩함, 참된 과는 동의 어적 개념 군을 이룹니다.
이 진리는 사람에게 죄로부터의 해방을 가져다주며 또한 의와 거룩함에로 초대합니다(엡4:21-24 /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따라서 ʾαλήθεια는 참된 것, 변치 않는 영원한 것, 썩지 않는 것, 거룩하고 의롭고 진실된 것,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에 나타난 ʾαλήθεια는 다음과 같이 요약 이해될 수 있습니다. 첫째, ʾαλήθεια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분 안에 있는 진리를 말합니다(요1:14-18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 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그러므로 구체적으로 육체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이 진리입니다. 둘째, ʾαλήθεια는 하나님 아버지와 말씀, 그리고 그분을 아는 지식이며 하늘로부터 온 모든 신령한 지혜와 계시가 진리입니다(요17:17 /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요일4:4-6 /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약3:13-18 /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경하고 다름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이러한 진리의 반영은 오직 성령에 의해 온전히 주장될 때만이 나타나는 진리들입니다. 따라서 ʾαλήθεια는 우리 안에 내주 하셔서 그리스도를 증거 하시는 성령을 가리킵니다(요15:26 /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꼐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셋째, ʾαλήθεια의 최상의 질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십자가로 표현되었고, 이 복음이 진리요 생명입니다(골1:3-5 /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
신약 성경의 증언에 따르면 이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은 안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말하고 있으며(엡4:13 /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 진리로 인하여 믿는 자들은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을 수 있으며, 진리로 무장될 수 있는 것입니다(엡6:10-11 / 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재판하는 총독이 진리 되신 그리스도를 앞에 두고도 진리를 몰라 물은 것과 같이 진리에 대한 물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될 때까지 영원한 질문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진리에 이르는 길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실체, 본질, 본체이시기 때문에 그 분 안에 참 진리가 있습니다. 그 진리를 얻은 사람은 모두가 자유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꼐서 “나는 진리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진리는 수학적인 진리가 아니요, 과학적인 진리도 아니요, 철학적인 진리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는 이보다 더 깊고 넓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진리를 말합니다. 존 칼빈(1509-1564)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기독교 강요’의 서문 첫 구절을 보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밖에는 없는데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요, 또 하나는 사람에 대한 지식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알고 인간에 대한 깊은 진리를 알면 그 밖의 모든 문제는 다 여기에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유무식에 관계없이 온갖 죄악을 짖고 그 죄악으로 자유를 성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자유는 죽이는 자유요, 자기를 잃어버리는 자유입니다.
반면에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로 말미암는 자유는 생명의 자유입니다. 해방의 자유입니다. 이 자유의 소중함을 안 사람들은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그 자유를 위해 몸을 던졌습니다. 만일 우리가 율법이나 선행, 자신의 의지, 기도, 행위가 주님의 이름으로 되어지지 않을 때는 그것이 도리어 속박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나 자신은 물론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진리가 머무는 방법
그러면 이 자유케 하는 진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주어집니까? 계시를 통하여 주어집니다. 계시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하심과 뜻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시는 것을 말합니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진리를 찾아서 자연 속에서, 혹은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서, 또는 자연 법칙이나 이성의 움직임에서 인식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열심히 추구하면서 특별한 느낌(종교적인 황홀경)으로 찾아서 인식하였다고 생각한 진리들은 진리가 아니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일방적으로 선포하시기를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을 청중들에게 들려줍니다. 이 명령을 성경 전체적인 입장에서 잘 관찰하여 보면 계시가 드러날 수 있는 자들만이 받을 수 있는 명령입니다. 성경에 의한면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천명합니다(신4:32-34 / 네가 있기 전 하나님이 사람을 세상에 창조하신 날부터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상고하여 보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이런 큰 일이 있었느나 이런 일을 들은 적이 있었느냐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너처럼 듣고 생존하였느냐 어떤 신이 와서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낸 일이 있느냐 이는 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의 목전에서 행하신 일이라). 하나님께서 진리를 계시하신 것은 이스라엘에게만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시147:19-20 / 저가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 도다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시 즉 진리와 더불어 살므로 믿음의 위인들은 계시 없는 삶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시1:1-3, 119편).
이는 구약의 이스라엘 뿐 아니라 신약에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말씀인데 신약에서 이러한 말씀을 대할 수 있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마11:25-27 /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이와 같이 진리는 오직 택한 백성인 믿는 자들에게만 주어질 수 있는 것이기에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명령도 우리 믿는 자들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믿는 자들을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가 가져다주는 은총들
무지로부터의 자유입니다. - 이 말은 일차적으로 영적인 일들에 대한 무지로부터 자유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모두 일반적인 의미에서 무지가 속박을 당하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사회구조를 살펴보면 모르는 사람은 제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기를 막아서는 문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직업을 얻는 일에 있어서 극히 제한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는 세계적으로 교육열이 대단히 높은 민족입니다. 일반적인 세계에서도 그렇듯이 영적인 세계에서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풍성해질 수가 없습니다. 교회 일을 하여도 자연스럽게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주어지는 일들을 두려워할 수 있고, 끝내 적응하지 못하며, 이에 더하여 만일 교회 믿음의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견고히 묶이지 않는다면 그러한 사람들은 언제든지 떨어져 나갈 수 있는 연약함이 상존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감정을 표현하는 일도 무척이나 서툽니다(창50:15-18). 그러나 진리를 알게 될 때, 그리스도를 알게 될 때 우리는 이러한 신앙적인 부자유스러움과 불편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진리를(ʾαλήθειαν)’ 알지 못하면 주님도 우리를 모른다고 하실 것입니다(마7:21 /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γνώσεσθε τήν ʾαλήθειαν καί ή ʾαλήθεια ʾελευθερώσει ʾυμας).” 여기에서 알다라는 단어 그노세스데(γνώσεσθε / γινώσκω - 알게되다, 인식하다, 인지하다, 이해하다, 깨닫다)는 말로 마1:25에서 ‘동침하다’는 단어로 사용됩니다. 즉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행동함으로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주님의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행동하는 믿음의 양식들을 따라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가신 진리의 길을 가지 않고 있는 한 우리는 그리스도를 안다고 함부로 공언할 수 있는 단계가 안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행동하지 않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진리가 나타나지 않는 무지를 걷어 낼 수 있는 말씀의 은총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이를 간구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무지를 일소하고자 소원하는 결연한 의지를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은 보이는 것입니다. 믿음은 나타나야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주님은 행동하는 믿음으로 온 천하에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과 승천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인 것입니다(히12:2 /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은 세계를 무대로 하여 그 믿음을 마음껏 발휘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에 세상에서 주님을 부끄러워한다면 주님도 우리를 부끄러워 할 것입니다(마10:32-33 /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우리에게는 누구든지 주님께서 주신 믿음의 분량이 있습니다(롬12:3). 이 믿음의 분량(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는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험한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 길이 바로 진리의 길입니다. 주님이 가신 길이 진리의 길이기에 십자가의 도가 역시 우리에게 진리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고전1:18).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는 합당치 아니하며 자기 목숨마저 주님을 위해서 잃게 될 때 찾을 것이라는 역설(Paradox - 모순된 것 같이 보이면서도 옳은 말 예: The child is father to the man)적인 진리로 우리의 무지를 깨우치십니다. 이와 같이 진리가 가져다주는 은총은 무지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즉 행동하지 않는 무지로부터 움직이게 하는 진리입니다.
진리가 가져다주는 은총은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 참 자유란 진리가 주는 자유이어야 합니다. 돈이 주는 자유는 허무입니다. 건강이 주는 자유는 무상입니다. 결국은 병이 들고 죽은 것이므로 세상이 주는 자유는 한계성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통하여 나타난 자유는 죄의 결박과 환난에 얽혀 있는 근본적인 문제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롬6:23의 표현대로 죄의 세력은 지금도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인간을 파멸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고 결국은 인간의 생명을 그리스도와 분리되도록 유혹하여 지옥의 불에 던져너어 버리는 파멸의 세력입니다.
우리는 이 무서운 지옥의 형벌을 피하기 위해 주님의 말씀대로 발이 범죄 하면 발을 찍어 버릴 수 있습니까? 그리하면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의 눈이 범죄케 하면 빼어 버려 애꾸눈으로 천국으로 갈 수 있는 진리의 길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마치 보물섬에서 나오는 실버 선장과 같이 보화로 가득찬 천국을 찾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 온전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엘리엇(T.S. Eliot, 1888-1965)이 말하기를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습니다. 죄악을 물리치기 위한 혈전을 인생들이 벌린다면 일년에 4월만이 잔인한 달이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아마도 인류 전 역사가 잔인한 역사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불가능해 사회의 규율과 법을 새롭게 정비하여 통제력을 행사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경찰로 채용하여 무조건 죄가 있는 사람들을 감옥에 처넣으면 죄가 이 세상에서 청산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아마도 60억이 되는 인류(1999년 오전 9시 24분 60억명 돌파) 중 전체 모두가 죄인 인고로 세상의 감옥으로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세계의 모든 기능이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죄인들을 자유케 하신다고 말씀하시니 이러한 염려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이하 34-36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는 말씀을 선포합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자유케 하시면 제 아무리 억만의 죄악의 짐을 지고 사는 자일지라도 누구든지 자 유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 있어서 주님은 참된 자유의 혁명가입니다. 특별히 죄의 종으로 묶여 있는 인생들을 자유케하는 혁명가이십니다.
유대교에서는 율법이 곧 진리라고 합니다. 따라서 저들은 율법의 연구가 인간을 자유케 한다고 믿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천지 만물을 지배하는 원리인 자연법, 즉 로고스를 따라서 살게 될 때에 인간은 자유를 얻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랍비나 스토아 철학자와는 다릅니다. 요한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진리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며, 그분은 죄에서 기독자를 자유케하는 해방자로 묘사합니다. 예수님 말씀하신 자유는 정치적인 자유, 철학적인 자유를 말함이 아닙니다. 진리를 통한 자유는 죄의 노예에서, 욕정의 노예에서, 교만의 노예에서, 편견의 노예에서, 사상의 노예에서 해방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진리만이 인간을 참으로 자유롭게 합니다. 진리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이 진리 되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로서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자들만이 참 자유인입니다. 왜냐하면 진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자유가 인간의 가슴속에 깊은 곳에서 고동(鼓動)칠 때 다른 자유도 보장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통한 자유로 모든 생활이 시작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 유하리라”
“진리를 사고 팔지 말며 지혜와 훈계와 명철도 그리할지니라” 잠23:23.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 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 이다.” 시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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