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설교본문

창6:5-10 그러나 노아는

아론33 2009. 3. 16. 17:04

그러나 노아는  창6:5-10


    신앙인은 언제나 여러 가지 국면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에게 찾아오는 국면들은 그 신앙인의 자세 여하에 따라서 순기능과 역기능의 양면성을 가지고 작용합니다.   성경을 접하게 될 때마다 그러한 국면들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다양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가 처해있던 국면은 민족의 멸망을 선포해야 하는 비운의 국면과 접하게 되나, 그 상황에서 즐기차게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정화하심을 전하고 있으며, 다윗은 분열된 민족의 지도자로서 나라의 통합과 부국강병의 역사를 이루는 인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왕이 되기전 광야와 이방나라에서의 고통이 그에게는 순기능으로 작용하여 통일왕국으로서의 확고한 자리를 유지하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인에게 그 어떠한 환란과 혼란 그리고 시련의 국면들일지라도 당사자에게는 순기능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베드로전서1:5-7에 적절하게 기록되여 있습니다.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노아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에 합당한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노아는 자기가 처한 상황 속에 굴하지 아니하고 신앙으로 그 국면들을 타계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노아가 처해있던 영적인 국면은 어떠한 국면입니까?  5-7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성경에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과 같이 노아도 평탄한 시대에서 살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great man's wickedness)하던 시대,  그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였던 시대 속에 묻혀있던 인물입니다.  이러한 시대에서 자기의 영성을 관리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을 것임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러한 시대를 보시는 하나님께서도 마음에 근심하시고, 그들의 존재에 대하여 한탄하시는 상황이였으니 노아가 처해있던 시대는 총체적인 타락의 시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죄를 항상 간과하시지 않으시지만 특별히 집고 넘어가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 자녀들의 타락입니다.   당신의 자녀들만은 순결을 유지하고 그 자녀들과 교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거룩한 교제를 위해서 아담의 혈통 중에서 셋 가계를 분리해두셨습니다. (4:25-26 /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아들을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그러나 경건했어야 할 그 셋 가계의 혈통마저 사람의 딸들에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아버렸고 이제 세상이 타락을 막을 길이 전무하게 되었습니다(6:1-2). 하나님의 사람들은 적어도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야 어두움을 몰아낼 수 있고, 부패를 방지할 수 있습니다.  바다 물이 썩지 않는 이유는 그 중에 2%의 염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타락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람들이 본연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한탄하시는 상황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노아가 살던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러한 역할을 감당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이러한 사실을 육체가 되는 사건(6:3-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으로 보셨습니다.   여기 ‘육체’라 함은 죄의 영향으로 사악하게 된 ‘타락한 육체’를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그들과 교제할 수 없으셔서 “6:3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토록 하나님의 사람들이 육체가 됨으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너무 많다)하게 됨은 필연적이였고,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의도)이 악하므로 온 세상에 죄의 보편화가 급속도로 팽창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칼빈은 인간의 전적인 부패라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상황이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계속하여 반복되였습니다.  노아가 살던 시대에도 그랬고 바울이 살던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롬3:9-18절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토록 타락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근심하심으로 주님의 창조한 사람들을 지면에서 쓸어버리실 것을 계획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죄악의 급격한 팽창 속에서 노아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이 은혜는 히브리어로  ן󰕚�이라고 하며, 헬라어로는 χα´ρις라고 하는데 이는 Favour, Kindness, Grace라고 번역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은혜의 출처가 오늘 본문에 하나님으로 나와있는데, 신약에서는 은혜 앞에 예수 그리스도가 강조됩니다.  이 은혜는 서신서들의 인사말에 거의다 등장하는 용어로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은총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아가 처해있던 영적인 국면은 위에서 살핀 그대로 죄가 관영하고, 인생이 악하여 하나님도 한탄하시는 최악의 상황이였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은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즉 심판의 전야에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음으로 타락한 세상 가운데서도 구별되고, 새롭게 되어 하나님 앞에서 인정함을 받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역할입니다. 그가 받은 은혜는 또한 구원의 은혜였습니다.


  롬3:23-26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도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이 은혜는 세상의 죄악에서 역류하게 하고 순결하게 하며, 분리되게 하는 상황을 창조하는 적극적인 기능이 있습니다.  이는 폭포수가 쏟아지는 곳에서도 물고기가 그 급류를 타고 올라가는 힘과 같은 것입니다. 이 은혜로 노아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른 새로운 국면을 창조했습니다.


    그러한 국면이 어떻게 기록됩니까?


    9절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여기에서 의인이라 함은 전혀 무죄하거나 흠없는 것이 아니라 악한 시대적인 상황에서 경건하고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한 것을 말합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의롭다 하심에 합당하게 서기 위해 경건의 훈련을 포기하지 않는 삶을 드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딤전4:7-8 /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우리들도 노아와 같이 은혜를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의롭다하심 합당히 서도록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노아의 사적이 당세에 완전한 자라 함은 그의 동시대 사람들 가운데서 노아는 상대적으로 사람과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한 성품을 추구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믿는 것과 아는 것에 하나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또한 기독교 역사의 초창기에는 믿음과 행위가 일치가 되어 기독교의 급속한 팽창이 가능하였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빛이 희미해지는 이 시대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서 이러한 인정을 받아서 기독교의 위상을 다시 정립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하였는데, 그가 ‘의인’과 ‘완전한 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한 결과요 은혜의 결과임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통하여 노아는 일백이십년을 인내하는 수고를 아끼지 아니했습니다.  그리고 방주를 완성하는 일에 있어서 자신의 경제적인 모든 가치를 쏟아 부었고, 결과적으로 세상의 심판 중에서도 보존되는 완전한 구원의 은총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러한 그의 신앙이 오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함을 받은 우리에게도 재연되어야 합니다. 왜 입니까?  우리도 노아와 같이 동일한 은혜를 우리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새로운 국면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적응하는 기능을 초래합니다. 이 사실을 11절과 12절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 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신앙인은 세상의 본질을 변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노아가 처해있던 상황도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나아갔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나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하나님의 심판의 계획과 공의를 알기 때문에  자신을 세상과 구별되게 관리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은혜로 말미암아 의인의 모습으로, 완전한 자로, 그리고 주와 더불어 먹고 마시는 삶으로 변화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노아와 동일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동일한 은혜의 힘을 입어서 세상속(에서 동화 되여 ‘동일한 육체’가 되지 말고 노아와 같이 신앙의 이력서를 새롭게 작성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벧후2:5-6절


“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노아의 시대에 하나님은 공의를 홍수를 내리심으로 이루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에도 죄의 관영함을 좌시하지 않으시고 유황과 불로 당신의 공의를 만족시켰습니다.  우리가 처한 마지막 시대에 그리스도께서 다시 임하실 것입니다.  히10:37절 -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치 아니하시리라.“ 그 때에 노아와 같이 완전한 자로, 의인으로, 동행한 자로서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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