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로마서 13:11-14 마지막 때의 삶

아론33 2009. 3. 16. 16:30

    로마서30 마지막 때의 삶  로마서 13:11-14


  세상의 모든 만사에는 때와 기한이 있습니다.  전도서 3장 서두에 기록된 대로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심은 것의 결과로 인하여 뽑을 때가 있습니다.  또한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습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다고 합니다. 

  전도서 기자 솔로몬은 때에 대한 교훈을 통하여 일상적인 삶에 찾아오는 모든 다양한 시기에 대하여 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사도 바울은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본문에 시기는 자다가 깰때요,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깝다는 표현을 함으로 마지막 때 즉 단일한 때에 대한 교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엽기적인 사건 소식을 전해들을 때, 또 어이없는 일을 당할 때 푸념하는 형식으로 “말세다 말세”라는 이야기를 종종합니다.  사실 이 용어는 기독교 용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세란 주님이 이 땅에서 승천하신 이후에 성령께서 초대 교회에 강림하심으로부터 시작하여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까지를 가르킵니다.  따라서 성경적으로 보면 지금이 이미 말세가 진행되고 있으며 그 종결은 주님의 강림하심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1).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말세는 이미 시작되었고, 진행되고 있으며, 종착역을 향해 열차가 달려가듯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데 마지막 날에 있어서 특징적인 것은 주님은 이 날을 비밀로 작정하여 두셨습니다(행1:7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살전5:1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일부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예수님의 재림년도를 정해 놓고 세상의 역사를 그때까지 만의 시한으로 정하여 모든 일상적인 삶을 정리하고 산으로, 또는 은신처로 피신하여 교주의 지시에 자기의 재물과 모든 운명을 맡기는 어리석은 일을 감행할 뿐 아니라 심지어 스스로 종말의 시간을 정해 놓고 자해함으로 세상을 종결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마지막 날(시기)은 어떠한 성격의 날입니까?


  그 날은 구원의 날입니다.  구원이 무엇입니까?  물에 빠진 사람이 물에서 나오는 것이 구원입니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이 그 병마를 딛고 일어서는 것이 구원입니다.   부도난 기업이 자금줄이 생겨 기사회생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가난한 자가 부유하게 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원보다  인생에 있어서 참된 구원,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현세적이고, 일차적인 구원은 죽음의 근본이요, 인생 최대의 적인 죄로부터의 구원되는 것입니다.   죄가 주관하는 삶으로부터 자유 하는 것, 해방되는 것이  구원입니다.  죄의 종이 되어 의에 대하여는 자유한 사람이 의의 종이 되어 죄에 대하여는 자유한 것으로 우리의 내적인 신분을 바꾸는 것이 구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가져다주시는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어거스틴입니다.  어거스틴은 354년 북아프리카에서 출생하여 17살 나던 해 카르타고에서 유학 생활을 하다 한여인과 깊은 육체적 사랑에 빠지면서 육체적인 방탕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악마적 이단 종교인 마니교에 심취하여 영적인 방황(19-29)을 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이 이러한 영적인 방황을 하게 된 이유는 인생의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인 진리를 찾기 위한 것이였습니다.  그리고 마니교와 결별한 후에 그는 또 신플라톤 철학에 영향을 받아 진리를 탐구하려 하였지만 영원한 진리에 대한 확신은 384년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읽었던 롬13:13-14절을 기점으로 한 회심을 통해서 얻게 됩니다.

  회심하기 전에 어거스틴은 자신이 비참한 죄의 노예라는 내면적인 고통과 울부짖음을 견딜 수 없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추한 죄에 대하여 번민했던 사람입니다.  그러한 그가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읽은 본문을 통하여 홍수처럼 흐르는 눈물의 회개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모든 의심을 걷어치우고 그가 그토록 찾고 싶었던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회심 이후에 그는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되었으며, 교회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는 주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처음 선포하신 말씀이 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마4:17)“.  우리는 회개를 통해서 우리의 추한 모습을 벗고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회개한 자를 또한 당신 나라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그들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17:21).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부어 주시는 회심을 통하여 죄적인 추한 신분에서 거룩한 의의 종으로 신분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일차적인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인 방황과 육체적인 방황을 종결시키는 것이며, 진정한 인생의 주인, 우리의 영원한 주군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내 인격 속에 모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만이 2차적인 구원,  종국적인 구원의 날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그 날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까? 라는 깊은 자기 고민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에게 있어서 2차적인 구원, 종국적인 구원, 최종적인 구원은 언제 이루어집니까? 이 구원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완성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신약 종말론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입니다.  이 완성의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한 자는 영생으로 그리스도를 배척한 안티기독교인이나 그리스도를 일관되게 무관심하여  모르쇠씨들은 영원한 심판의 날로 운명이 결정되어 질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재림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신약 교회의 믿음을 지배하여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왕국을 시작하시기 위하여 이 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셨고, 당신의 왕국을 최종적으로 완성하시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입니다.  따라서 초대 기독인들은 마라나타 즉 “주여 오시옵소서(계22:20, 고전16:22)”가 핵심 신앙이었으며 언제나 주의 재림을 갈망하였습니다.


  주님은 사복음서에서 재림에 대한 확실성을 교훈 하시기 위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재림에 관한 말씀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 일례로 농부들의 추수 때를 상기시키면서 말씀하시기를 그 때가 바로 세상의 끝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황금 들녘을 바라보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교훈을 되새기면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 믿음과 또는 그리스도의 교훈과 얼마만큼의 오차가 있는지 항상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부들의 일상적인 삶을 통하여 마지막 때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부들이 각종 물고기를 잡은 그물에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려 갈매기의 밥이 되게 하는 일상적인 생업을 통하여 재림하실 것과 재림 신앙을 가질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끝이 되면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물고기 비유를 통하여 어떠한 삶을 추구해야 됩니까?  난 사람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까?  아니면 된 사람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유명한 사람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까?   훌륭한 사람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까?  교회 안에서 말씀드리면 유명무실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까?  무명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아니면 두 마리 토끼를 다좇아 유명유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오늘 우리는 이것을 결정해야 하겠습니다(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주님의 사복음서 중 누가복음을 사실적, 객관적, 역사적으로 기록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주님의 승천을 바라보는 많은 성도들에게 선포되었던 천사의 말을 삭제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재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시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1장11절에 기록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반증해 주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다름 아닌 재림의 확실성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의 확실성과 가까움에 관해 바울 서신들은 아주 주의 깊고 세세하게 다루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지막 시기에 대한 교훈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데살로니가전서 같은 경우에는 재림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거론함으로 재림의 서신이라고 불리울 정도이며, 그 중에 저의 눈길을 머물게 하는 구절이 있었는데 5:23에는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이였습니다2).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이 그의 서신서를 통하여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집중 거론할 뿐 아니라 주님의 재림이 있기에  흠이 없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어떠합니까?  그는 계시록을 통하여 주님의 재림 전에 있을 징조와 사건들을 묘사함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하여 온 우주의 역사가 대단원의 결말을 보게 될 것을 증거 합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고백하기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확실성을 깨닫게 되고 재림 신앙이 초대교회 사도들과 성도들의 주된 관심사였으며,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그렇게 재림을 사모하며 기다렸듯이 우리 역시 주님의 오심에 대한 관심과 준비 그리고 재림에 대하여 어떠한 삶의 자세가 요구되어지는 지를 간접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우리는 어떠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우선 믿지 않는 자들의 삶에 대하여 파악함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가 혹 우리에게 있지 아니한가 반성하고 그리고 적극적으로 어떠한 삶의 자세가 필요한지 알아보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주님의 재림에 대하여 전혀 무관심하고,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깨닫지 못합니다.  마24:37-39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믿음이 없는 자들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온갖 해로운 정욕 앞에 전혀 무방비합니다.  그러므로 노아 시대에 해로운 정욕이 인생의 쳇바퀴를 다 살라 버리기까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일상적인 자기의 삶에 탐닉하다가 멸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러한 깨달음이 없는 백성들을 향하여 어떻게 외쳤습니까?  호4:14c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도 깨달음이 없는 자들을 향하여 극단적으로 표현하시기를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요8:43-44)”라고 책망하셨으며, 말씀을 들으나 깨닫지 못한 심령은 악한자가 와서 점령한 심령이라고 씨뿌리는 비유(마13:19)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함으로 다윗은 시119:27에서 “나로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가 진정한 기도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무지는 버림받은 인생으로 전락하게 만듭니다(엡4:17-183)).


   이제 믿는 우리들은 이 마지막 때를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사도 바울은 12절을 통하여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옷은 사람의 행동을 상당한 부분 통제합니다.    양복을 입고 축구를 할 수 없듯이 옷은 사람의 행동을 통제합니다.  우리가 결혼식에 갈 때에 작업복을 입고 가면 실례가 됩니다.  가끔 국제회의를 주제하고, 또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들을 치를 때 연미복을 입고 식장에 나타납니다.  이와 같이 옷은 사람의 행동을 적절하게 통제하는 구실을 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낮 즉 하나님의 나라, 새로운 시대가 가까웠으니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고 합니다.  어두움의 일은 13절에 나타난 대로 방탕과 술 취함과 음란과 호색과 쟁투와 시기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이 어두움의 일들이 어떠할 때 나타납니까?  통제되지 않을 때 나타납니다. 


  몇 년 전 수봉산에 좀 올라갈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급경사가 나 있는 언덕길 옆 주택이 대형덤프 트럭에 의하여 산산이 부서져 있고, 또 트럭도 앞 전면이 심하게 손상된 것을 보았습니다.   브레이크가 파열된 것입니다.  통제되지 않은 차가 대형 사고를 일으키듯이 통제되지 않는 삶이 파멸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이 파멸을 정지시키기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당신께서 파멸의 십자가를 지시고 인생을 위해 우리의 비참한 죽음을 죽어 주신 것입니다4)

  그러므로 주님은 의당히 우리를 향하여 어두움의 일을 벗으라고 말하실 수 있으며,  주님만이 능히 죄로 붉게 물든 옷을 벗기우실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소선지자 스가랴는 하나님 앞에서 여덟까지의 환상을 봅니다.  그 중에 오늘 말씀과 관련하여 넷째환상를 살펴보면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섭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당신 앞에 선 자들에게 명하여 말씀하시기를 “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하시고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아름다운 옷이 무엇입니까? 최근 장안에 화재가 되었던 수천만원대의 밍크 코트가 아름다운 옷입니까?  아니면 늘씬한 패션모델들이 입고 활보하는 옷이 아름다운 옷이겠습니까?  앙드레 김이 직접 제작한 옷이 아름다운 옷입니까?   어떠한 옷이 아름다운 옷입니까?  여러분이 백화점에 들리면 카드로 긁고 싶을 정도로 탐나는 옷이 아름다운 옷입니까?  아니면 아간이 여리고성을 함락하면서 감추어 두었다 죽임을 당한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벌이 아름다운 옷입니까? 아름다운 옷은 이러한 옷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행동을 통제해주고, 주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게 통일성을 제공해 주는 옷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옷입니다.  눅15장에서 아버지가 탕자에게 입혀 주었던 제일 좋은 옷(눅15:22)입니다. 이 옷은 자비의 옷입니다. 용서의 옷입니다. 사랑의 옷입니다.  그 옷에는 믿음이라는 아름다운 브로찌가 달려 있습니다.   그 옷에는 생명의 면류관이라는 모자를 쓰면 가장 잘 어울리는 옷입니다.  그리고 그 옷은 순결이라는 감촉을 가진 흰옷입니다.  성도는 그 옷을 입고 하나님 보좌 앞에 서 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이 옷을 입으면 그 누구도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할 수 없는 옷입니다.   우리는 이 옷을 입고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 동안 걸쳐 입어서 냄새나는 불신앙의 누더기 옷을 오늘 주님 앞에 벗어 던짚시다.  그리고 음란과 호색이란 사치스러운 옷을 벗어 던집시다. 또한 미움과 시기 그리고 전쟁이란 거추장 스러운 옷을 벗어 던지고 그리스도로 옷입고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합시다. 


  이제 결론을 내립니다.  로마서의 주제는 이신득의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쯤에 와서 우리는 로마서의 주제가 이신행득의라고 함이 어떠한가 생각되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바울은 믿음만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그에 따른 삶을 야고보 이상으로 강조한 균형 잡힌 대 사도입니다.  사도바울이 오늘 우리에게 마지막 때를 언급하였습니다.  이미 우리는 말세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한부 종말론 자들, 광신적인 종말론 자들에 의하여 지금은 성경적인 종말 신앙에 대하여 설교한다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시대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 초대교회 성도들의 진주와 같은 마라나타 신앙이 우리 기독교에서 탈색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은 이천년 전에 이 땅에 성탄절이 있었듯이 재림의 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 날에 우리의 구원은 완성이 될 것입니다.  이 절대적인 시기을 사복음서에서 주님께서 다각도로 말씀하셨고, 사도행전에서 그리고 서신서 각권에서 언급하고 있으며 계시록의 주 관심이 바로 주님의 재림 사상입니다.  이 시기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세상의 정욕이 우리의 목자가 되어 지팡이와 막대기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믿지 않는 자들과 같이 일상적인 자기의 삶에 탐닉하다가 멸망의 구렁텅이에 들어가야 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밤이 깊었으니 낮을 준비해야 합니다.  노아가 타락의 깊은 밤에 방주를 준비5)하고 정화된 새로운 신천신지를 맞이했던 것과 같이 우리들도 노아와 같이 이 세상에서 주님의 말씀과 동행하기 위해 그리스도로 옷입고 하나님 앞에 단정히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 계1:7 볼찌어다 구름을 따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2) 빌립보서 4:4-5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3) (엡4: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4) 벧전4:1-3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5) 창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