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롬13: 8-10 사랑은 율법의 완성

아론33 2009. 3. 16. 16:29

로마서 29  롬13: 8-10  사랑은 율법의 완성


  사랑은 문학과 예술에 있어서 최대의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대부분의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말하는 사랑은 신과의 사랑이 아니고 사람 사이의 사랑이요, 그 중에 남녀간의 사랑이 주류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제아무리 사랑을 예찬한다고 한들 세상에서 그려지는 사랑은 사람 사이에 있는 수평적인 사랑뿐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제아무리 아름다운 사랑을 노래한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수직적인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한 그 노래는 미완성의 노래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평적인 사랑으로 인생의 전체적인 부분을 깨닫고 이야기하기란 역부족이기 때문입니다.  요사이는 영화와 문학에 있어서 작품의 소재가 얼마나 바닥나 있는지 남녀간의 순결한 사랑을 그리기보다는 파격적이고, 파괴적인 사랑 즉 육욕적이고 감각적인 사랑을 자주 묘사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저급한 문학(배설문학)과 영화 매체를 통하여 사랑 법을 터득한 대부분의 젊은 남녀들은 사랑에 대한 가치관을 올바로 정립하기도 전에 일시적이고, 충동적이며, 쾌락적인 사랑에 쉽게 빠져들어가는 안타까운 모습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순결한 사랑을 이야기하고,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려 해도 그러한 사람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치부되는 서글픈 현실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인생이 묘사하는 사랑이 왜이리 불결하고, 시대의 조류와 유행에 의해서 진실된 사랑이 이다지도 왜곡되고, 퇴색되어갑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된 세상을 정화하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랑이 무엇이고, 사랑은 어떻게 해야 하며, 사랑하는 원칙에 대하여 몸소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사랑이 무엇입니까?  그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힘입어 구원함을 얻을 때에 우리의 조건과 환경을 보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사랑하여 주셨습니다(요일4:9-10)1).

  사람들 사이에 있는 사랑은 환경과 조건에 의하여 계층화되어 있고, 분리되어 있습니다.  학력 때문에 사랑의 길이 막힙니다.  재력에 의하여 사랑의 길이 막힙니다.  성격 차이 때문에 사랑이 깨어집니다.  건강에 의하여 사랑은 외면 당합니다(롬1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어떠합니까?  주님은 건강을 잃어버린 자 앞에 건강 때문에 버림받은 사람들 앞에 나아가셨고, 모든 사람이 멀리하는 창녀와 세리들 앞에 나아가셨으며 세리 마태를 당신의 제자(마10:1-4)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2)하셨습니다.  그러한 사랑을 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가깝게는 2000년 전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사람들이요 멀게는 그리스도를 믿었던 모든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믿는 자는 이 사랑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야 합니다(엡5:1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우리도 불신앙의 세계에 있을 때에 조건적인 사랑에 익숙하였지만 주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받은 자라면 우리의 잘못된 사랑 법에 대하여 반성해야 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가운데는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목회하였던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의 목회 사역을 위해 당신의 여동생도 그의 목양지에서 같이 협력하였습니다.  그러던중 그 여동생이 두다리가 없는 장애자로부터 이성의 눈을 뜨게 되여 그와 결혼하게 되였습니다.  여동생의 결혼식을 지켜보면서 목사님은 많이 울으셨다고 합니다.   목사님께서 사랑을 전하고 이야기 하셨지만 사람인지라 인간적인 상식과 조건적인 사랑 법에 길들여진 목사님은 분명 그러한 사랑, 무조건적인 사랑을 잠시나마 이해할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님께서 그들의 결혼을 반대할 수 없었던 이유는 장애자 목회자였으며 또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경험하셨고, 그 동생자매도 그러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 행하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모습이 아닙니까?   이와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은 바로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방법으로의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될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8절에서 피차 사랑의 빛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빛도지지 말자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는 모두 사랑의 채무자요,  그렇기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우리 기독교가 아무리 사랑이 메말라 있어도 우리는 사랑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에 대하여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기독교가 이 사회 속에서 올바로 자리를 잡을 수 없습니다.  농부가 흙을 만지기를 싫어한다면 그는 농부가 아닙니다.  흙을 사랑해야 진정한 농부입니다.  산업체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철가루를 뒤집어쓰는 것과 기름이 몸에 닿는 것을 싫어하고 부끄러워한다면 그는 그 일을 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이 온갖 서식을 작성하는 일을 게을리 하고 한다면 그 사람은 그 자리를 떠나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기독교의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싫어한다면 기독교인의 자격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전존재는 사랑의 결과물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있게 된 것은 부모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낳실재 괴로움 다잊으시고 기르실 때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닿토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높다 하리요 어머님의 은혜는 한이 없어라.  우리는 모두 이웃에게 사랑에 빛진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은 어떠합니까?  호11: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계1:5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여 주심으로 우리의 신앙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의 빛을 지고 있는 사랑의 채무자입니다.  주님의 이러한 사랑을 올바로 헤아릴 수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무엇을 달라, 이렇게 해 달라 청구만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내가 주님과 같이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요? 라는 성숙한 고민에 빠져야 합니다.   이러한 자세가 성숙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사랑할 의무밖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사랑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합니다.  믿음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러나 외침만 있고, 실천이 없는 사랑과 믿음을 주님은 외면하십니다.  계시록의 일곱교회중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계2:4-5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실천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듯이 실천이 없는 사랑은 또한 생명이 없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빛졌고, 유무형으로 이웃에게 많은 빚을 졌습니다.  그러므로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율법의 큰 정신과 온갖 관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십계명의 1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대신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말씀하는 것이요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그 사랑에 근거하여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수평적인 사랑만을 한다면 균형을 상실하는 것이요, 또한 수직적인 사랑만 하는 것도 어딘가 어색하며 차거운 사랑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두 사랑이 균형을 이루고 평형을 이루어야 진정한 사랑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율법이 요구하는 실천명령입니다3).  사도바울이 이미 율법이 신령하고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고 말한 것은 바로 율법의 이러한 정신을 두고 한 말입니다(롬7:12).


  그렇다면 사랑의 구체적인 방법과 표현법이 무엇입니까?


  총론은 남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나 사랑한나머지 자기 연민(憐憫 불쌍하고 가련함)에 빠져들 때가 있습니다.   또한 지나치게 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관대하고 남에 대하여는 냉정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제는 반대로 타인에 대하여 연민을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남에 대하여 관대하고 자신에 대하여 냉정해야 합니다.  

  이제 이러한 총론을 실행하기 위해 사도바울이 말하고 있는 사랑의 각론은 무엇일까요?


  간음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순결뿐 아니라 이웃의 순결을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은 순결을 어느 정도 신경써야하는지를 잘 설명하여 줍니다.

  (마5:27-30) 또 간음(간통)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이 시대는 거대한 관음증에 걸린 사회입니다. 또한 사회 직위의 고하를 막론하여 성적인 질서가 문란한 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함에 있어서의 제일보는 바로 이러한 타락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도도하게 역류하는 것입니다.


  또한 살인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웃의 생명을 존중하라는 말씀입니다.  서울의 전철역이나 허름한 화장실 또는 큰 병원에 화장실을 갈 기회가 있으면 유심히 벽을 살펴보십시오.  장기매매하실분을 찾는 문구가 가끔 눈에 뜁니다.   또한 어떤 악덕 사채 업자는 채무자를 협박한 후 장기를 반 강제로 매매하게 함으로 타인의 생명에 손상을 가하는 경우가 보도 매체를 통하여 공공연하게 들려 옵니다.  또한 학교 폭력은 어떠합니까?  학교에서는 소위 “짱”의 위치를 소유하기 위해 또는 지키기 위해 그리고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패싸움과 학교 폭력에 상처를 받는 이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바로 이 시대가 악한 시대요 폭력으로 물들어 가고 있는 시대입니다4).    참으로 살벌한 사회입니다.  이토록 냉각되어진 사회에 열기를 더해 주고 온기를 더해주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요일3:14-16)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도적질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도적질이라고 할 때에 이웃의 물건을 몰래 가져오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도적질은 이 사회에 광범위하고 주도면밀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남의 아이디어 상품을 특허 내기 위하여 서류 전형을 밝는 동안 먼저 특허권을 소유하여 남의 재산권을 침해합니다.  또한 어떤 이는 자기가 쓴 논문도 아닌 것을 도용하다가 지적재산권 침해 사범으로 법적인 공방을 벌립니다.   대기업은 어떠합니까?  기업을 방만하게 운영하다가 한계에 다다르면 채권단에 되리여 큰소리치며 으르렁댑니다.  그리고 대기업의 빚이 몰고 온 파장을 국민과 힘없는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교묘한 도적질을 합니다. 왜 이 사회의 각분야에서 그렇게도 광범위한 도적질을 저지릅니까?  주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 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5).


  마지막으로 탐내지 말라(갈망, 욕심을 내다)고 합니다.  (눅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3: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어려서부터 가르쳐 주지도 않은 욕심이 어찌 그리 많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심이 자라면서 자제되고 조절되어야 할텐데 오히려 은폐되고 교묘한 방법으로 미화되고 포장 되여 독버섯과 같이 자라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10만원이 없을 때에 100만원이 있으면 만족할 것같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욕심에는 한계와 끝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욕심의 표본 격인 사람이 몇이 있는데 그 중에 아담이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피조물의 위치에서 자족하지 못하고 창조자의 위치를 넘보다가 인류에게 사망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압살롬은 권력에 눈이 멀어 아버지 다윗을 권좌에서 내몰았습니다.  마지막에는 전쟁의 현장에서 아침 이슬과 같이 사라졌습니다.   오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욕심의 독버섯에 죽어 갑니까?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우리 안6)에 욕심을 불태워 버려야 합니다.


  결론해서 말씀드립니다.  사랑은 성도의 시금석(요13:35)7)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정신을 표현하는 기초석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수평적인 사랑, 편협한 사랑을 논하지 않습니다.   감각적이고 일시적이며, 쾌락적인 사랑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이요, 그 사랑의 방법을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친히 보이셨습니다.   성도는 위로 하나님에게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아래로는 다른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이미 받았고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채무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방법은 계명에 충실한 것입니다.  그리고 남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함으로  사도바울이 고전13장에서 사랑을 이야기했듯이 다시한번 고전13장의 속편이 우리의 심령과 우리의 삶 주변에 기록되도록 사랑하여 율법의 정신을 실현하는 성도, 율법의 완성도가 사랑 때문에 높아지는 일들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1) (요일4:9-10)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2)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3)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벧전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4) (사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5) (행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6) (마15:18-19)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7) (요일4:7-8)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