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롬11:25-36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아론33 2009. 3. 16. 16:25

    로마서 25  롬11:25-36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느끼면 느낄수록 그 사랑을 이웃에게 증거하고 싶은 마음에 불타오릅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랑은 깊고 넓으며 사람이 가히 측량할 수 없으리만큼 숭고하기 때문입니다.  사람 사이에 있는 사랑은 상황적이고, 비교적이며, 또한 일시적이며, 조건적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은 사람 사이에 있는 사랑 이상으로 절대적이며, 무한하고, 변함이 없이 지속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그러하기에 누구든지 그러한 사랑을 자신의 인격 속에서 경험하면 그 사랑의 영향(고후5:14)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모방하고,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지고 살아가려는 강한 의지가 솟구쳐 올라옵니다.   사도 바울이 아마도 그러한 사람인 듯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화를 받아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를 작사하였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람은 온유하며 사람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한다고 노래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사랑을 올바로 정의하고 논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베푸신 사랑을 친히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쇠를 녹이는 용광로와 같이 강팍하고 흠이 많은 우리 자신을 그 사랑의 뜨거운 불길로 녹이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재창조(고후5:17)하셨습니다.   창조되기 이전에 참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하며 진리를 옳게 분별하지 못하던 어두운 심령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강권하시는 사랑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그 결과 예전에 그렇게 달콤하던 죄들이 이제는 거추장스럽고 얽매이는 것으로 바뀌었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해된 이후에는 그리스도를 밝히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가게 하셨으며, 그리스도만이 참 생명의 등불임을 믿게 되었고, 그리스도만이 참된 진리임을 확신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영생의 소망(요17:3)을 가지게 하셨으니 얼마나 감사 한일이며 벅찬 일입니까?   이러한 지식은 세상의 유사종교들이 가져다 줄 수 없는 가장 복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그 구원하는 사랑이 너무나 존귀하고 값진 것이라서 자기 동족들도 자기와 같이 동일한 믿음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의를 경험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심지어 자기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 끊어질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료 되여 자기의 민족인 이스라엘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소망했습니다.  사도바울이 이토록 구구절절이 자기의 민족이 구원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무엇에 근거한 것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9장 이후로 오늘 11장까지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깊이 있고, 체계적으로 다루어 왔으며, 이제 그 결론을 오늘 본문을 통하여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결론은 한마디로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오늘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언약1)에 대하여 말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구약에 소금 언약(레2:13 언약의 소금)이라 하였는데 이는 언약의 영원한 속성과 일관성을 묘사하는 말씀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언약은 최초에 에덴동산에서 맺어졌습니다.  이것을 어머니복음 또는 원시복음이라고 합니다(창3:15)2) 

  그리고 세상이 타락하여 홍수의 심판으로 나아가자 하나님은 노아와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보존하십니다(창6:18 /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노아 언약의 구속적인 의미는 노아의 후손을 계속 유지시겠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후손이란 말속에는 미래에 인류의 구원을 성취시킬 여인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께서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의 후손 중(셈과 함과 야벳)에 셈의 후손에서 나온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창15:6, 18 자손)은 하나님에 의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근거하여 그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수립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천하만민에게 구속을 전달할 궁극적인 매체로서 바로 히브리 족속을 선택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은 국가적이였기에(출19:5-6)3) 국가와 교회는 거의 하나가 되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들어온 이후 약 400년 동안 바알주의의 유혹과 빈번한 이스라엘의 배교행위가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하나님께서는 이 계약을 다윗과 체결하심으로 그의 왕조가 영원하리라는 것을 말씀하였습니다(삼하7:16). 이는 육신적으로 보면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하게 성취될 것을 지시합니다(계22:16).


  이러한 언약이 신약에서는 이스라엘의 경계를 넘어 그 언약의 축복이 모든 국가의 모든 백성들에게 확대되어질 보편적인 것이 될 것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보편적인 구원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고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으로 이스라엘이 완악하게 된 후에 그들은 구원될 것이라고 사도바울이 담대히 주장합니다.  이제 비로소 사도바울이 문제를 제기했던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에 대하여 한층 가벼운 글로 글을 정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롬11: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롬11: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롬11:27)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에 온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주된 이유는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능동적이고, 지속적인 사랑 때문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구원에 어떠한 특징이 있습니까? 이 사실을 알아보고 바울의 감격적인 감사와 찬양을 들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의 성격은 복음에 원수로 행하였던 모습을 돌이키시는 구원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에 대하여 철두철미하게 등을 돌린 민족이요,  언약의 주인공이신 그리스도를 배척한 민족입니다.  사실 그리스도를 넘겨준 것은 가륫 유다이지만 그러한 배경과 상황을 제공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 이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물질에 눈이 어두운 유다와 언약의 주인공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무지가 만들어낸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복음 앞에 원수로 행하였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왜 돌이키시겠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당신의 언약에 신실하시기 때문이며, 그들을 당신의 사랑에 근거하여 선택하여 주셨기 때문(신7:7-8)입니다.  

  

  (롬11:28) 복음으로 하면 저희가 너희를 인하여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 (롬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우리는 가끔 우리의 사랑스러운 어린아이와 함께 길을 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아이들은 종종 자기의 마음과 눈이 닿는 대로 길을 선택하고 자기의 길을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볼 때 아이들이 선택한 그 길은 대개의 경우 위험한 길이며, 목적도 타당한 이유도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그래 그러면 너의 마음대로 가라고 방관합니까? 아니면 그 길을 수정하고 자기의 품으로 억지로라도 인도합니까?  만약에 마음대로 가라고 한다면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라고 한다면 절대적으로 어린아이들이 무목적으로 길을 갈 때 잘못된 길을 가지 못하도록 강한 손으로 그들을 잡아당기고 정상적인 길로 인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자녀요 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발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자녀를 돌이키시어 택함을 입은 지위를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하십니까?  그들의 죄를 없이하신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며, 참되고 복된 소식입니까?   그것도 그 옛날 이사야 선지자의 기록을 참고하여 이스라엘의 구원받을 것에 대하여  더더욱 확신합니다(사27:9).   이사야 시대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범죄한 나라가 되었던 백성입니다.  그러나 이토록 황폐한 상황 속에서도 선지자 이사야가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의 일관된 사랑을 알고 이스라엘의 장래에 대하여 말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시대에 이스라엘은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이들도 역시 오늘 본문에 보니 완악하며, 복음의 원수로 행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섭리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도 이사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가슴이 뜨거워지는 말씀입니까? 

  저는 민족의 구원은 차치하더라도 가정의 구원 문제를 생각할 때 마음 한구석이 무척이나 무겁습니다.  이유는 모두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답답한 심정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마치 눅16장에 등장하는 지옥에 간 부자의 절박한 심정이라고 할것입니다.  부자는 예수 믿지 않으므로 음부에 들어가 하나님에게 절규합니다.  “하나님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라는 글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하여 강한 소망과 확신 속에서 사랑을 입은 백성이기에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것이며, 택하심과 부르심을 입었기에 일관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을 것이란 가볍고 즐거운 글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구원 얻는 길은 어떠한 근거에 의하여 되어집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 떄문에 되어지는 것입니다.


  (롬11:30)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롬11: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롬11: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여기에 기록된 긍휼5)이 무엇입니까? 


  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옷을 벗기우고 폭행을 당하여 거반 죽게 됩니다.  이 때에 길을 가는 행인 중에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으나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에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비용을 들여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줍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교훈인데, 여기에 자비가 바로 긍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 삼아 주셨고, 또한 우리도 이웃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죄악에 의하여 의로운 옷은 벗겨지고, 강도 같은 죄악에 폭행을 당하여 거반 죽엇으나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되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희생당하심으로 이스라엘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시어 살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전에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죄인이 되었으나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으로 이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가 성립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자비와 친절이 나타나 구원의 주권성이 올바로 성립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 문제나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이러한 깊은 경륜에 대하여 어떠한 노래로 찬양을 올립니까?


  (롬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11: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롬11: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롬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모략가란 사실을 높입니다.  이러한 구원하심에 대하여 누가 감히 주님의 사랑과 언약의 신실하심 앞에 보답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이유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든 일의 처음과 끝 역사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에게 달려 있듯이, 구원 섭리의 주재자가 하나님이심을 높이고 있습니다.  


  결론하여 말씀드립니다.  이스라엘의 현재는 버림받은 백성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미래는 구원 얻을 것입니다.  현재적으로 이스라엘은 이사야 시대에 그랬던 것 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반역하고 타락한 백성이 되었지만 이들은 구원함을 얻을 것입니다.  이들이 구원얻을 이유는 이스라엘에게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처음에 말씀드린대로 상황적, 조건적, 비교적,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며, 일관된 것이기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선택된 그들은 다시 구원될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랑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강팍하고 완악한 심령이 용광로에 쇠가 녹듯이 용해되여 다시금 하나님을 높이는 백성들이 될 것입니다.  그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힘 입는 것으로 이방인인 우리나 이스라엘도 이 긍휼하심으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 긍휼하심을 입은 우리들은 사도바울과 같이 하나님을 높이는 신앙을 가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1) διαθήκη 유언, 유서, 언약, 계약.  תירב 인간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의무,


2)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3) (출19:5-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4) (사1: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사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사1: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5) ʾέλεος 자비, 동정심, 긍휼, 은혜, 친절. 눅10:25-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