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롬10:16-21 복음에 대한 반응

아론33 2009. 3. 16. 15:44

    로마서22  복음에 대한 반응  롬10:16-21 


(롬10:16)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ʾΑλλʾ ʾου πάντες ʿυπήκουσαν τω ʾευαγγελίω·   ʾΗσαιας γάρ λέγει,  Κύριε, τίς ʾεπίστευσεν τη ʾακοη ʾημων;

  ʿυπήκουσαν(VIAAZP) ; ʿυπακούω 듣다, 귀를 기울이다. 복종하다.  ʾευαγγελίω(NDNS) ; ʾευαγγέλιον 좋은 소식, 복음, ʾεπίστευσεν(VIAAZS) ; πιστεύω 믿다, 신용하다, 맡기다, 위탁하다.  ʾακοη(NDFS) ; 들음, 듣는.  ʾακούω듣다에서 유래.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ʾάρα ή πίστις ʾεκ ʾακοης ή δέ ʾακοή διά ʿρήματος Χριστοΰ

ʿρήματος(NGNS) ; ʿρημα 말, 주제, 사건, 일, 말씀.  

(롬10: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ʾαλλά λέγω, μή ʾουκ ʾήκουσαν; μενοΰνγε, ʾΕις πασαν τήν γην ʾεξηλθεν ʿο φθόγγος ʾαυτων, καί ʾεις τά πέρατα της ʾοικουμένης τά ʿρήματα ʾαυτων.

μενοΰνγε(QS) ; --라기 보다는 오히려, 감히, 그렇지 아니하다.  γην(NAFS); γη 땅, 흙, 지구, 나라, 육지, 세상.  ʾεξηλθεν(VI2AAZS) ; ʾεξέρχομαι 나가다, 나오다, 퍼지다,  φθόγγος(NNMS) ; 음성, 소리. πέρατα(NANP) ; πέρας πείρω관통하다에서 유래,  한계, 경계. ʾοικουμένης(NGFS) ; ʾοικουμένη 사람이 살고 있는 땅, 사람이 사는 세계, 인류, 세상, 천하.

(롬10: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ʾαλλά λέγω, μή ʾΙσραήλ ʾουκ ʾέγνω; πρωτος Μωΰσης λέγει, ʾΕγώ παραξηλώσώ ʿυμας ʾεπʾ ʾουκ ʾέθνει, ʾεπʾ ʾέθνει ʾεπʾ ʾέθνει ʾασυνέτω παροργιω ʿυμας.

   ʾέγνω VIAAZS; γινώσκω 알게되다, 지각하다, 알아차리다.  παραξηλώσώ VIFAXS ; παραξηλόω 질투하게 하다,  시기나게하다.  έθνει NDNS ; ʾέθνος 인종, 민족, 국가, 복수로는 나라들, 이방. 민족, 열방.  ʾασυνέτω ADNS ; άσύνετος 지각이(이해력이)없는, 꺠달음이 없는.   παροργιω VIFAXS ;  παροργιάίξω 성나게하다. 노엽게하다.

(롬10:20)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ʾΗσαίας δέ άποτολμα καί λέγει, ʿΕυρέθην ʾεν τοις ʾεμέ μή ξητοΰσιν, ʾεμφανής ʾεγενόμην τοις ʾεμέ μή ʾεπερωτωσιν.

  άποτολμα VIPAZS ; ʾαποτολμάω 매우담대하다. ʿΕυρέθην VIAPXS ʿευρίσκω 찾다, 얻다. 나타나다.  ξητοΰσιν VPPADMP ; ξητέω 찾다, 구하다, 연구하다, 문의하다.  ʾεμφανής ANMS ; 명백한, 분명한.  ʾεγενόμην VIADXS ; γίνομαι 존재하게되다, 일어나다, 생기다.  ʾεπερωτωσιν VPPADMP ; ʾεπερωτάω 묻다, 송사하다, 시험하다, 문의하다.

(롬10:21)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πρός δέ τόν ʾΙσραήλ λέγει ʿόλην τήν ʿημέραν ʾεξεπέτασα τάς χειράς μου πρός λαόν άπειθουντα καί ʾαντιλέγοντα

  ʿόλην  AAFS ; ʿόλος 전부의, 완전한, 모든, 종일, 두루, 전체, 온통. ʾεξεπέτασα VIAAXS ; ʾεκπεταννυμι 벌리다, 펼치다,  내밀다, 뻗다.   χειράς NAFP ;  κέιρ 손, 팔, 권능   άπειθουντα VPPAAMS ; ʾαπειθέω 순종치아니하다, 좇지 아니하다, 버리다.   ʾαντιλέγοντα VPPAAMS ; ʾαντιμέγω 반대하여 말하다, 반론하다, 반대하다, 비방하다, 반역하다.



  복음을 증거 하면 두 가지의 반음이 나타납니다.  듣는 자와 듣지 않는 자로 분리되어 집니다.   여기 듣는 자를 순종하는 자로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에 대한 반응을 순종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여러분은 복음에 순종하는 자입니까?  아니면 복음에 불복종하는 자입니까?  말씀을 들으면서 같이 생각해 보고 혹 우리 안에 불순종의 요소들이 있다면 진단하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집중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음에 순종할 수 있는 여건을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장치를 통하여 준비하셨습니다(예배, 제사장의 교훈, 절기 등).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선지자들의 파송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길목마다 또는 어떠한 길로 가야 될 모르는 시점에서 선지자들을 보내시어 그들을 권고하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라는 강한 명령을 내리십니다(렘25:5 내가 너희에게 보내고 부지런히 보낸 나의 종 선지자들)  그러므로 그 말씀들은 온 땅에 퍼지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도록 증거되었다는 것이 사도바울의 주장입니다(18).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실패하였습니다.   이러한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외치기를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라는 절규의 소리와 같이 이스라엘 민족은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데서 실패한 백성이 되었습니다(사1:2-4). 


  그렇다면 이토록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주된 이유가 어떠한 것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에 말씀하신 내용을 통하여 알아보고, 그 반대로 순종은 무엇인지 알아보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해변의 배에 올라가 앉으셔서 씨뿌리는 비유(마13:3-9)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십니다.  그 내용을 보면 어떠한 농부가 씨를 뿌리러 나가서 씨를 뿌리는데 어떠한 씨는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어떠한 씨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져 흙이 깊지 못하므로 곧 싹은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다고 말씀하셨으며, 또 어떠한 씨는 가시 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아 결실치 못하였으나 반면에 어떠한 씨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씨의 결과에 대한 문제는 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씨가 떨어지는 곳(마음)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는 것이 주님 말씀의 요지입니다(마13:18-23).


  첫 번째로 씨가 길가로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는 비유에서 길가는 복음에 대한 반응에 있어서 듣는 자의 마음의 상태가 길과 같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마음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으나 깨달음이 없어 금방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김에 있어 전혀 무방 비한 심령을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심령을 성경에서 찾으라면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에 롯의 사위들과 같은 심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롯은 천사가 소돔에 이르자 영접하고 천사들의 계획-우리로 이 곳을 멸하러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창19:13)-을 듣게 되고, 천사들은 롯에게 관계된 사람들을 다 성밖으로 이끌어 내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 메시지에 놀란 롯은 황급히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찾아가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그러나 사위들의 반응은 냉담합니다.   “뭐 그러한 일이 다 있겠습니까? 장인 어른 어디에 그러한 징조라도 있습니까?” 하면서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우실 때에 그들이 사는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실 때에 엎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롯의 사위들은 롯의 경고의 메시지를 들었으나 깨닫지 못하여 멸망한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올바로 반응을 하려면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깨닫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의 믿음을 관리하지 못할 뿐 아니라 롯의 사위들과 같이 멸망하기 쉽상입니다(호4:14).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음을 들었으나 올바로 반응하지 못한 것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사6:9,10 마13:14). 


  두 번째로  돌밭에 뿌리웠다는 비유는 말씀을 듣는 심령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돌밭과 같은 심령은 말씀은 듣기는 듣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일시적인 깨달음도 있는지라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습니다.  그러나 흙이 없는 돌밭인지라 말씀이 자라기 위한 뿌리를 내리지 못함으로 잠시 견디다가도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는 곧 넘어지는 자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이러한 인물을 성경에서 찾으라면 구약에 아간이란자를 들 수 있습니다.  아간은 이스라엘이 요단을 향하여 고난의 행군을 하던 중 광야에서 태어난 자로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요단강을 건널 때에 물이 갈라지는 기적을 몸소 체험하였고, 또한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성을 하나님의 기적 같은 손길로 무너뜨리우는 것에 깊은 감격과 기쁨에 찬 함성을 온 이스라엘과 함께 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간은 여리고성이 무너질 때에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에 그만 자기의 믿음을 다 팔아 버리고 자기의 장막 깊은 땅속 가운데 감추었습니다(수7:21). 

  일찍이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을 공격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습니다. “이 성과 그 가운데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라,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찌니라(수6:17-19)”   그러나 아간은 이러한 경고를 무시하고 자기의 사욕이란 이리에 사로잡혀 그만 하나님의 물건을 도적질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그는 아골골짜기에서 비참한 운명-돌로 치고 불사르고-을 맞이합니다.

  아간의 이러한 실패는 일시적으로 은혜 생활을 한다고 하여서 믿음의 완숙기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믿음은 끊임없이 자기 부정을 통하여 관리되어지고 유지되는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또한 믿음은 자기라는 돌과 같은 심령을 걷어 낼 때에 깊은 뿌리를 내리 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뿌리가 있을 때만이 환난과 핍박의 시기에도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부정함으로 자신을 이기고, 타인을 향해서는 인내함으로 극복해야 하며, 세상의 유혹과 쾌락의 도전 앞에서는 절제함으로 극복하여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완악한 자기들의 심령을 극복하지 못하여 복음을 듣지 못하였습니다(마13:15).  돌짝같은 묵은 심령을 우리는 주님의 말씀으로 기경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복음에 올바로 반응할 수 있는 것입니다((호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셋째로 가시 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가장 강력한 적은 염려와 근심입니다.  믿음은 맡기는 것인데 염려는 그 반대로 자기의 문제를 자기가 해결하겠다는 자만이요, 교만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 여러곳에서 염려하지 말라는 권고를 자주 듣게 됩니다.   염려는 믿음의 심령을 둔하게 하고 무디게 합니다(눅21:34), 또한 염려는 마음의 균형을 상실하게 하여 불안이란 신앙의 적을 복제합니다.  또한 염려는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을 제거하고 그곳에 믿음의 암적인 요소를 배양하고 산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만이 하나님께서 주장하시는 평강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빌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또한 우리가 얼마나 돈의 매력에 매료되어 있습니까?  어떠한 신물의 사설을 보니 자본은 경제의 피라고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생명은 바로 돈에 모든 가치가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돈에 관한 지대한 관심은 예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는 것같습니다.  오죽하면 돈궤를 맏았던 가룟 유다가 은 30에 은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팔았겠습니까?  요즈음에 큰 사건들이 대개의 경우 돈과 관련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돈은 참으로 매력적이고, 육신의 눈으로 보면 그렇게 멋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 반드시 우리가 우선시 해야 될 것이 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돈을 버는 것 이상으로, 또한 명예를 얻는 것 이상으로 주님의 말씀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켜야 복음에 올바로  반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심령들-길가, 돌밭, 가시 떨기-을 경계하고 회개함으로 돌아설 때에 복음에 올바로 반응할 수 있고, 순종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순종하는 마음의 옥토 밭이  있을 때에 말씀이 자라 결실하여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에 올바로 반응하게 하는 순종은 어떠한 것입니까?  이 역시 듣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은 단지 듣는 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말씀을 집중하여 듣고 또한 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행동이 수반되어질 때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순종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들라면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심으로 당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주님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희생의 낮아지심으로 우리 인류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순종은 겸손한 자의 것입니다.  또한 순종은 충성의 친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2:3-4)”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러한 말을 하였지만 사도 바울 자신도 복음에 충성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습니다(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면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복음에 올바로 반응하기 위한 순종은 겸손한자와 충성하는 자만이 가능합니다.  겸손은 나를 비울 때에 가능합니다.  충성은 가치를 올바로 알 때에 가능합니다.  복음에 대하여 나를 낮추고, 복음에 대한 올바른 가치를 알아듣고 순종하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 평생에 신앙생활을 통하여 교회와 역사와 민족 앞에 많은 결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은 복음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하나님이 구속하심에 대한 깊은 사랑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방인이 복음의 혜택을 입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고 바울이 설명합니다(19,20)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스라엘과 같이 무지하고 깨닫지 못하는 심령도 하나님께서는 종일 손을 벌려 기다리신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어떠한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 안에 이스라엘의 불 신앙과, 불복종이 용해되어질 수 있다는 밝은 전망이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이 비록 탕자와 같이 하나님의 품에서 멀어졌지만 하나님은 탕자를 기다리심과 같이 이스라엘을 기다리십니다(21). 또한 우리의 불신앙을 극복하여 주님의 손에 붙들리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에 대한 올바른 반응을 위해서 방해되는 요소들이 어떠한 것이 있습니까?  그것이 나 자신입니까? 물질입니까?  세상의 염려입니까?  환난과 핍박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손)에 귀 기울여 복음에 장애 되는 이러한 요소들을 극복하여 복음에 대하여 올바로 반응하는 순종하는 겸손한 심령, 복음에 충성하는 심령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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