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

롬9:1-18 하나님의 선택

아론33 2009. 3. 16. 15:40

    로마서9:1-18   하나님의 선택


(롬9: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 하다하노니.

    근심λύπη ; 근심, 고통, 비탄, 슬픔.   큰μέγας ; 큰, 놀라운, 높은, 심히, 중한. 과함.  그치지 않는ʾαδιάλειτος ; 끊임없는, 그칠새없는, 간단없는, 계속적으로.  고통ʿοδυνή ; 고통, 괴로움, 비탄, 아픔.  


  우리는 이제껏 영으로 사는 삶이란 제목 하에 그리스도의 구원을 생각해 보았고, 영으로 사는 삶은 거듭난 자만이 가능하며 거듭난 자가 영으로 삶을 영위할 때 생명과 평안의 역사가 찾아오며, 이 세상에서 뿐 아니라 다가올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이기에 기꺼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또한 성령안에 삶의 자리를 정한 사람들은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사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에 도우시는 일을 하시며, 이 도움으로 인하여 구주 되신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되며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한 역사를 이룬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또한 마지막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사랑을 그 어떠한 피조물이라고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되는 프리미엄(premium)1)이 그 얼마나 큰지 우리는 영으로 사는 삶이란 주제를 가지고 다방면으로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되여 성령의 역사 하심과 인도하심을 따라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며, 소망스러운 일이며, 우리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총은 이 세상의 그 어떠한 가치보다도 높으며,  아름다운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가져다주는 평안은 일시적입니다.   그리고 지극히 상대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하심으로 그 자녀들에게 가져다주는 영적인 평안과 기쁨과 감사는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절대적이며, 항구적이며, 안정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의 서두에 보니 그렇게 감사하고, 확신에 찼던 사도 바울의 명랑하고, 밝았던 심성에 갑자기 먹구름이 끼인 듯 큰 근심과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하소연합니다.    그것도 자기의 양심을 걸고, 참말이며, 거짓말이 아니라는 말을 첨부하여 그의 고통과 근심의 사연이 범상(凡常-대수롭지 않고 평범함)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고통과 근심의 내용을 바울이 3절 이하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3절부터 5절까지 주의하여 살펴봅시다.


(롬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9:4)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롬9:5)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 저는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이 말씀에서 바울의 고통과 근심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분명히 드러납니다.   바울의 고통과 근심은 다름 아닌 그의 형제와 골육의 친척을 위한 것이였습니다.  이 말씀을 좁은 시야로 살핀다면 단지 혈육의 정을 나눈 친척이겠지만 넓은 시야로 보면 그의 민족 이스라엘 사람(4)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영예는 알프레드 노벨에 의하여 만들어진 노벨상을 받는 것이 가장 큰 영예 중에 영예일 것입니다.  노벨상은 세상에서 가장 큰 권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가장 큰 영예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양자 되는 일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일이며, 이 일을 위해 하나님 앞에 선택되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권리를 갖는 일입니다.  그 권리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진입하며,  하나님의 언약과 약속을 바라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과 사랑이 나타난 율법을 들을 수 있는 귀와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이토록 영예스럽고, 영광스러운 것이기에 바울은 그 나라를 위하여 고난받는 것에 가장 선봉에 서는 선봉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과거에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단지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그 한가지 사실과 율법을 지킨다는 미명하에 혈통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착각과 잘못된 확신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감옥에 집어넣는 일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그의 열심히 잘못된 열심히였으며, 하나님을 얼마나 욕되게 하는 일이며, 수치스러운 일이였는지 스스로 반성하였습니다2).

  바울이 과거에 그랬듯이 그 당시에 바울이 속해 있던 대다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배척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미 참된 구원자로 오신 그리스도가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이 없었어도, 유대 관원들과 지도자들의 불손한 선동에 넘어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이구동성으로 외쳤습니다.   그리고 감히 말하기를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찌어다”고 외쳐댔습니다(마27:25). 

  또한 사도 바울이 복음의 사역을 감당할 때에도 동족 유대인들은 사역의 길목 길목에 장애 요소로 등장하여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일에 일조 하였습니다.  바울이 안디옥 교회의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순례의 길을 다니며 복음의 사역을 감당할 때에 유대인들은 선동하여 바울과 그의 동역자 바나바를 핍박하여 생명의 복음 증거 하다하다 일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습니다3).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인도주의4), 박애주의, 사해동포주의적 정신에 따라 사도바울은 그들의 시기와 증오 그리고 배척을 넘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이스라엘 동족이 참된 양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즉 선민의 지위가 회복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생각이요, 큰 믿음이요, 큰 사람입니까?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선민의 지위는 혈통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과 선택에 의하여 그 지위가 부여되어진다는 사실을 6절이하 13절까지 구약의 이삭과 야곱의 경우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이삭의 경우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6절로 9절까지 먼저 보십니다.


(롬9:6)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롬9:7)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롬9:8)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9: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구약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이 99세가 되도록 자녀가 없었습니다.   이미 그는 칠십오세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었습니다(창12:1-4).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그러나 10년이 지나도록 자녀가 잉태되지 않자 자기의 의지대로 사라의 몸종이였던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낳아 육신의 자녀가 되게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육신의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을 관철코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육신의 씨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잇는 상속자로 세우지 아니하시고 이삭의 후손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그 후손이 가나안을 차지할 것이요, 그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과 백성의 하나님이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속한 일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의 창세기 기사를 통하여 사도바울은 선택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고유의 권한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선택이 하나님의 절대적 고유 권한임을 사도바울은 8절을 통하여 곧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는 말씀을 통하여 잘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민이 되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기인하는 것이지 사람에게서 출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 내가 얻고자 하여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란 말씀과 같습니다.  믿음으로 의를 얻어 양자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 편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이로 볼 때 우리 믿는 사람들은 모두 약속의 자녀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우리가 바로 아브라함의 직계 자손이요, 이삭의 씨가 되는 것입니다5).  이 사실을 확실히 알고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열렬히 바램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해당하는 자녀들만이 양자 됨의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선택의 절대적인 주권에 대하여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의 출생기사를 통하여 다시 한번 확인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처럼 하나님의 선민의 지위를 올바로 증거 하다하기 위하여 두 번씩의 예화를 드는 것은 선택의 기준을 명확히 하기위한 것입니다.  즉 선택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롬9: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롬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롬9: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롬9: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아브라함이 자녀를 늦게 보았듯이 그의 아들 이삭 역시 자녀를 늦게 보았습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인도에 힘입어 리브가를 아내로 삼아 행복하게 살았지만 그 가정에는 태에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삭이 잉태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여호와께 간구합니다.  “하나님 나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믿습니다.  우리 자손을 통하여 하나님은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고 하셨으니 그 약속대로 나에게 자녀를 주옵소서”라고 간청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간구를 들으시고 그 아내 리브가에게 잉태의 복을 내리십니다.  그런데 태중에 아이들이 자라 노는 것을 유심히 관찰하니 아이들이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고민스럽자 리브가는 하나님 앞에 간구합니다.  이 일을 어찌합니까?  그 때에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자를 섬기리라”는 말씀 이였습니다.  즉 어린자가 장자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장자란 영육간의 상속자를 말합니다. 

  이 이야기를 빌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양자 됨의 기준이 인간의 선악간의 행위에 따라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되어진다는 사실을 밝히 증거하고 있습니다(11).

  사실 믿음을 가져 하나님의 양자된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우선 사도바울 자신도 행위로 구원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확연합니다.  사도바울은 많은 성도들을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가편 투표를 하였으며, 회당에서 믿는 자들을 여러번 형벌하였고,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것도 성에 차지 않자 외국 성까지 나아가서 핍박하였던 사람입니다(행26:10-1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향하여 일절 오래참으사 그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던 것입니다6)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 그 어떠한 공로도 없이 단지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선민의 자격이 부여 되어지는 것은 사람 편의 그 어떠한 행위로 되어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부르심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선택하심의 내적이고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롬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롬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롬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하나님의 부름에 발로는 하나님 편에 있는 긍휼(동정, 자비, 연민, 불쌍히 여김)에서 시작되어 집니다.  구약의 모세는 하나님의 선한 모든 형상을 본 사람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선한 형상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은혜 받을자, 긍휼히 여길자가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다는 사실을 다시금 알 수 있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택하심의 발로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서 시작되는 것이지 원하는 자가 아므리 고행으로, 선을 행함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죄인에게 베푸시는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 앞에 순결하지 못하고 음란히 세상을 섬겼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사 회복의 은혜를 주시어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여기 회복이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에서 제외되는 심령은 어떠한 심령을 갖게 됩니까?  구약의 애굽 왕이였던 바로와 같이 강팍하게 되어집니다.  바로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강팍하여 결국 엄청난 재앙을 자기의 나라와 가족에게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결론해서 말씀드립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 앞에 선택되어 양자로 부름받은 선민입니다.  이 선민되는 것은 인간편의 어떠한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에 의해 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제아무리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이미 긍휼히 여길자라면 그 완강한 저항은 거대한 폭풍우 앞의 작은 돗단배와 같이 나약하여 무너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완강하여 믿는 무리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삶을 살았지만 결국 하나님의 긍휼케 하심고, 은혜에 사로잡혀 하나님 앞에 쓰임 받았던 것과 같이 우리 역시 선민이란 사실을 분명히 알아 사도 바울과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구원이 내 가족과 민족 앞에 나타나기를 간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1) 주식, 공사채 등의 매매 가격이 액면 가격을 초과하였을 때의 그 초과액


2) (딤전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으뜸, 첫째)니라


3) (행13:50)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행14:2)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행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행17: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 내려고 찾았으나 (행24:5)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


4) 인도주의 ; 박애적 정신에 의해 인류의 공존, 공영을 꾀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주의.

  박애주의 ; 인종적 편견이나 국가적 이기심을 버리고 인류 전체의 복지 증진을 위하여 전 인류               가 평등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주의.

 


5) (갈3: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 (갈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갈3: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6) (딤전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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