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4 복음의 세계적인 성격 롬11:11-2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신 이유는 그들을 통하여 세계를 구원하고 정화하기 위한 계획이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대하여 지나친 우월감과 교만으로 인하여 이방인을 멀리하였으며, 하나님의 복음이 자기들만의 것으로 착각하여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에 정반대로 나아갔습니다.
이러한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 복음 앞에 실족하였고, 넘어졌으며, 실패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복음은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우월감과 폐쇄적인 철의 문을 넘어 이방인에게로 적극적으로 선포 되였고, 그 결과 구원의 복음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풍성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었다고 바울이 11절과 12절에 논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방인은 유대인들을 제외한 세계의 모든 민족을 언급합니다.
(롬1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저희의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롬11:12) 저희의 넘어짐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며 저희의 실패가 이방인의 부요함이 되거든 하물며 저희의 충만함이리요
특히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복음 사역을 감당하실 때에 유대인들의 시기와 질투는 극에 달하여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리에까지 내 몰았던 배반의 민족이였습니다1). 그러나 유대인의 왕손으로 오신 주님의 복음 사역은 유대인만을 위한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이방인들에게 치우친 것도 아닌 모든 자를 위한 사역이셨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강조하신 전도에 대한 명령을 유심히 살펴보면 복음의 세계적인 성격이 잘 드러납니다. 그것은 복음의 대상이 유대 땅과 그 민족에게 국한할 것이 아니라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일에 적합한 인물로 바울을 선택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습니다(롬1:5, 갈2:8; 1: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심).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본문 13절에는 “내가 이방인의 사도이며, 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긴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롬11: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사도바울이 이렇게 고백하는 것은 복음의 세계적인 선포를 위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직분자로 임명을 받았다는 것에 대한 깊은 감사와 자기 직임에 대한 확신이 담겨 있습니다. 요사이 교회가 침체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직임을 얻는 것에 대하여 무척이나 부담스러워 합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 이겠으나 교회 안에서 직임을 받게 되면 유무형으로 많은 시간과 물질을 교회에 투자해야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은 심령이라면, 그리스도의 희생을 믿고 그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자세는 잘못된 것인 줄 알아 복음의 장벽이 우리의 이기적인 생각과 인색한 마음을 넘어 밖으로 표출되기 위해서라도 교회의 부름과 사역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훌륭한 것은 그가 복음의 세계적인 성격을 알았고, 그에 스스로 헌신하였다는 점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직장에서 승진하고, 연봉과 월급이 올라가는 것에 관심은 있으나 교회안에서의 영광스러운 직임에 대하여 무관심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복음을 외면하고, 복음의 강력한 흐름이 우리 안에서 그 얼마나 정체되었는지를 잘 대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사도바울과 같이 교회 안에서 주어지는 직임에 대하여 영광스럽게 여기고 감사하는 그러한 믿음을 가짐으로 우리안에 선포된 복음이 우리 자신을 넘어 이웃에게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바울이 구원의 복된 소식에 사로잡힌 로마인들에게 어떠한 충고를 통하여 복음에 올바로 반응할 것인가를 가르칩니까?
그것은 자긍(κατακαυχασαι)2)하지 말고, 높은 마음(교만)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18a 20b).
세상에서도 어떠한 지식이 있으면 지식이 없는 사람을 향하여 우쭐대고, 으시댑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입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지식이 있으면 그 지식을 가지고 헌신하고 사회의 온갖 부조리를 개혁하고 정화하는 일을 해야 하는데, 그 지식을 가지고 자기만을 살고, 남을 죽이거나 무시하니 그러한 사람이 지도층 인사로 행사하면서 이 사회가 어디로 나아가겠습니까? 또한 경제적인 강자들, 가진자들이 경제적으로 약자인 민초를 향하여 우쭐대고 으시대면 이 사회가 어디로 향하여 가겠습니까? 상부사회를 지지하고 있게 하는 것은 어디입니까? 바로 하부사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복된 소식을 접하게 하신 것은 바로 어두운 세상을 밝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이 어둡고 척박한 세상에 내려보내신 것도 하부 사회를 밝히시고 정화하시기 위한 것이며, 이 일을 우리 교회에게 맡기신 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사역3)을 감당하라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심령에 어두운 세상에 대하여 자긍해도 안되고 높은 생각을 품어도 아니됩니다.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온 사람들을 대할 수 있는 아량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것을 이방인의 구원과 관련하여 생각하여 보면 사도바울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롬11:16)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이 말씀은 민수기 15:17-21의 말씀을 인용한 글입니다. 이는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면 그 해의 모든 열매를 다 바친 것을 대표하게 되어 나머지도 거룩하게 된다는 것이고, 나무의 뿌리가 거룩하다면 그 가지도 거룩하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이 말씀에 대한 의미를 재해석하여 보면 처음 익은 곡식 가루는 이스라엘의 조상, 즉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을 가리키킵니다. 그리고 떡덩이는 이스라엘 민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스라엘 족장들과 그 민족이 거룩했으니 남은 그의 자손들도 거룩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나무의 뿌리와 가지의 비유로 재차 설명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이방인인 로마인들을 향하여 경계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실족하여 넘어진 사이, 이스라엘이 시기하여 복음 앞에 실패한 사이에 이방인인 너희가 들어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조상은 참감람나무의 뿌리이며 이스라엘의 후손은 그 가지인데 본 나무의 가지가 벌레가 먹거나 메마르면 잘려지고 대신 돌감람 나무가 접붙임을 받는 것과 같이 이방인인 로마인들이 이 자리를 대신하여 돌감람나무의 가지에서 나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이 되었다는 비유로 설명합니다.
(롬11: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
여기 돌감람나무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이방인인 로마 사람을 말하며, 지금으로 말하면 우리 자신을 가리킵니다4). 그리스도밖에 있을 때 로마 사람이나 우리는 야생마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길들여지지 않은 그러한 사람들 이였습니다. 그러나 거친 들에서 사는 야생마가 길들여지기 위해서는 주인의 더없는 수고와 희생이 따르듯이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잘못된 기질을 몸으로 담당하시고 그 결과 우리로 의의 생명을 얻게 하시어 주인의 의도에 따라 바른 길을 가는 준마(駿馬 잘달리는 우량한 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5). 그리고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이스라엘과 함께 받는자(거룩함) 되도록 은혜와 은총을 허락하셨습니다. 이러한 은혜와 은총의 허락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되어진 것으로 접붙임을 받은 가지는 뿌리에 의해 지탱되고 뿌리에서 영향을 받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접붙임을 입은 가지는 잘려나간 가지에 대하여도 전혀 자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당연한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스라엘의 실족함과 실패를 비웃고 자긍할 하등의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렀고, 구원의 풍성함이 세계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버림받음은 세상의 화목이 되었습니다(15).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이방인인 로마 사람들과 우리들이 가져야될 태도는 어떠한 것이 되어야 합니까? 18절과 21에 보시면 자긍하지 말고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겸손해야 되는 것입니다.
(롬11:18)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긍하지 말라 자긍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롬11:19)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이운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롬11:20)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11:21)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즉 이 말씀은 너의 위치를 올바로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음에 대한 위치를 올바로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구원을 받은 것은 유대인보다 의로와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로마서 1장 18-32을 통하여 이방인의 죄에 대하여 알아보았듯이 이방인들 역시 철두철미한 죄인인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볼 때 이스라엘을 향하여 높아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본래 구원의 복된 소식은 이스라엘에게 먼저 주어졌습니다. 이들이 실족하여 넘어진 주된 이유는 믿지 아니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게 된 이유는 믿으므로 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향하여 자긍하거나 높은 마음을 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향하여 자긍하거나 높은 마음을 품을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결국 이스라엘도 하나님 앞에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22절부터 24을 통하여 그 사실을 알아보겠습니다.
(롬11: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 (롬11:23)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롬11:24)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려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얻었은즉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얻으랴
바울은 위의 진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엄격하심에 대한 교훈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심으로 이방인을 용납하시고 그들의 죄과를 십자가에게 도말하셨습니다. 그리고 현재적으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의 공의(엄위) 앞에 버려졌지만 미래적으로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즉 믿는다면 접붙임을 얻을 것이라고 바울이 전합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이 회복될 것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생식능력이 전혀 없어 보이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을 통하여 이삭을 출생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지금 현재적인 시각으로 볼 대 이스라엘이 완악하고, 그리스도를 배반하여 떠나 있을 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리면 그들도 감람나무에 접붙여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론해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이 즉 복음이 처음으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으나 그들의 실족함과 넘어짐으로 그 복음은 이방인에게 넘어갔습니다. 그결과 복음의 셰게적인 속성이 잘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이스라엘이 더러는 완악하여 넘어지고, 실족하여 졌을지라도 다시 그 복음은 이스라엘과 이방인 전체의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받은 사람은 그 누구도 자긍하거나 교만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안에서 인종적인 갈등과 이기적인 생각들을 걷어 낼 수 있습니다. 분명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는 자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도록 역사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가진자가 복음 앞에 그리고 세계 앞에 가져야 될 자세는 겸손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과 같이 겸손하여 그 복음이 이웃을 향해 전파되도록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복음에 대하여 지나치게 우월감을 갖는다면 그 복음은 자기 자신 안에서 빛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1) (마27:18) 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러라
2) κατακαυχαομαι 뽐내다, 우쭐대다, 으시대다, 자랑하다, 떠벌리다.
3) (골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4) (요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요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5:1)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사5: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5) (벧전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벧전2: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로마서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롬12:1-2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0) | 2009.03.16 |
---|---|
롬11:25-36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0) | 2009.03.16 |
롬11:1-10 은혜의 우월성 (0) | 2009.03.16 |
롬10:16-21 복음에 대한 반응 (0) | 2009.03.16 |
롬9:30-10:15 하나님의 선택3 (0) | 2009.0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