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1 음식에 관한 교훈 롬14장
어린이들은 생각이 깊지 않으므로 단순합니다. 그리고 어린이들의 마음은 백지장과 같아서 어른들이 어떠한 말을 하든지 그대로 듣고 따릅니다. 또한 이들은 보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외가택에 간 일이 생각이 납니다. 그 근처에서 목수의 일을 하시던 어르신들이 대패질을 한참 하다가 대패질로 생긴 나무껍질이 모여 있는 더미에서 무엇을 먹고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저는 대패질할 때 나오는 나무껍질이 먹는 것인 줄 알고 십대가 지나 이십대가 되어서야 그 진실을 알았습니다. 그 진실이란 나무껍질과 똑같은 색인 오징어를 찢어 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린아이때 가진 고정관념을 깨는 것과 바꾼다는 것1)이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신앙인들의 세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면 아무래도 구약의 율법에 많은 구속을 받아 서로간에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지어 제풀에 못 이겨 교회를 떠나가는 경우(왕따?)가 왕왕 발생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유아기적인 신앙인들에게 주로 나타납니다.
음식에 관한 교훈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이 음식에 관한 교훈을 하면서 믿음이 연약한 자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연약한 자가 채소를 먹는다고 기록2)합니다. 구약의 다니엘서에 보면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왕실에서 식민지의 지배자가 되는 교육을 받습니다. 왕은 이들에게 자신의 산해진미와 그의 포도주를 먹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대부분의 이교도들은 음식과 술을 마시기 전에 먼저 자신들의 신에게 봉헌하는 예식이 있었으므로 다니엘과 그의 동료 친구들은 왕의 이러한 음식을 먹는 것이 이방신을 섬기는 것이 됨으로 뜻을 정하여 자기들을 더럽히지 않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육식을 거절하고, 채식만을 고집하여 나중에 하나님 앞에 크게 쓰임을 받는 큰 인물이 됩니다. 이와 같이 우상의 제물에 연관된 음식을 거부하는 것이 구약 신앙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전통 이였습니다.
또한 율법의 계율(레11장)에 의하면 먹는 것과 먹지 못하는 것을 분리하여 기록 되여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육식을 먹는 일에 있어서 제한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반드시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만 먹고 둘 중에 하나만 있는 것은 먹지 못하는 짐승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토끼는 되새김질을 하되 발이 쪽발이 아니라서 먹지 못하는 짐승이였습니다. 또한 돼지의 경우(레11:7-8)에도 굽이 갈라져 있으나 되새김질을 하지 못하므로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짐승이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음식을 먹는 다는 것은 계율에 반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엄위로운 율법을 범하는 죄로 간주하여 생명을 걸고 부정한 음식을 먹는 일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유럽과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3대륙에 걸쳐 대제국을 세운 알렉산더가 32(기원전 323)세에 죽자 그의 제국은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의 세 왕국으로 분열됩니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을 포함한 팔레스타인지역이 이집트 왕국에 복속되어 있었지만 나중에 시리아왕 안티오쿠스가 3세기(기원전223-187)에서 2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팔레스타인을 이집트인들로부터 빼앗아 이스라엘 지역은 시리아의 통치하에 들어갑니다.
이때에 안티오쿠스4세는 자기의 왕국에 영을 내려 말하기를 모든 사람은 자기의 관습을 버리고 한 국민이 되어야 한다고 명령하였습니다. 특히 안티오쿠스 왕은 예루살렘에 사신을 보내어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렸습니다.
유대인들은 이교도들의 관습을 따를 것, 안식일과 기타 축제일을 지키지 말 것, 성소와 성직자들을 모독할 것, 이교의 제단과 성전과 신당을 세울 것, 돼지와 부정한 동물들을 희생 제물로 잡아 받칠 것, 사내아이들에게 할례를 주지 말 것, 온갖 종류의 음란과 모독의 행위로 스스로를 더럽힐 것, 이렇게 하여 율법을 저버리고 모든 규칙을 바꿀 것
그리고 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하였습니다.
안티오쿠스의 칙령에 의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버렸고, 안티오쿠스가 세운 감독관에 따라서 율법을 버린 유대인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안티오쿠스의 감독관과 함께 나쁜 짓을 저질렀습니다. 이러한 일에 참아 가담하지 못했던 의식 있던 유대인들은 숨을 곳을 찾아 피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안티오쿠스는 기원전 167년에 예루살렘의 번제 제단이 있던 자리에 제우스에게 희생의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율법서는 발견되는 대로 찢어 불살라 버렸고, 율법책을 가지고 있다고 들키거나 율법을 지키거나 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왕명에 의해서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하시딤)은 율법에 어긋나는 복종을 거부하고 기꺼이 고난과 죽음을 감수하였습니다. 그리고 안티오쿠스의 칙령에 정면으로 들고 일어선 사람이 제사장 마타디아의 아들 유다였습니다. 그를 사람들은 ‘망치와 같은 자’란 뜻의 마카베오라고 하였는데 그와 시리아와의 전쟁을 일컬어 마카베오 독립 전쟁이라고 합니다.
안티오쿠스가 통치하던 시절 오늘 말씀과 관련하여 아주 인상적이고 특이한 순교자(마카베오하7장)들이 있는데 그 중에 일곱 형제들과 어머니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왕에게 체포되어 채찍과 가죽끈으로 고문을 당하며 율법에 금지되어 있는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강요를 받습니다.
그들 중의 맏형이 왕 앞에 대변자로 나서서 왕에게 말하기를 “우리를 심문해서 무엇을 알아내겠다는 것입니까? 우리 조상의 법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습니다”라고 말하자 안티오쿠스는 화가 나서 솥과 가마를 불에 달구라고 명령합니다. 명령대로 솥과 가마를 뜨겁게 달구자 안티오쿠스는 남은 형제들과 어머니의 눈앞에서 그들의 대변자로 나섰던 맏형의 혀를 자르고 머리카락을 밀고 사지(두팔과 두다리)를 자르라고 명령합니다. 그의 명령에 따라 그 대변자 아들이 폐인이 되었지만 왕은 생명이 붙어 있어 신음하는 큰아들을 뜨겁게 달군 솥에 넣어 버리라고 명령합니다.
발갛게 달군 솥에서 아들의 몸이 이글이글 타 들어가 사망에 연기가 퍼져 나갈 때에 나머지 형제들은 어머니와 함께 서로 격려하면서 고상하게 죽자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보시며 틀림없이 긍휼히 여겨 주실 것이다”라고 그들이 신앙적인 확신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순교를 각오합니다.
이러한 말로 서로 격려하자 박해자들은 둘째 아들을 끌어내어 희롱하였습니다. 그리고 머리 가죽을 머리카락째 벗겨 낸 후 그들은 “네 사지를 다 잘라 내기 전에 돼지고기를 안 먹겠는가?”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둘째 아들은 “절대로 못 먹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맏형과 같이 참혹하게 모두가 다 순교를 당했고, 마지막으로 어머니마저 순교의 제물이 되어 하나님 앞에 갔습니다.
오늘 우리가 즐겨 먹는 돼지고기 특히 삼겹살은 계명에 충실하게 살고자 원하던 유대인들 경건한 사람들(하시딤)에게 있어서는 특별한 사연이 있던 음식이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와 같이 하나님의 율법은 자기의 생명 이상인 생명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의 생명을 포기하는 일은 있어도 하나님의 생명력이라고 믿었던 율법은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 구약의 계명 아래에 살던 백성들에게 구속력이 있었던 율법의 영향은 어떠한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고민이 오늘 로마교회내에서 갈등을 불러 일키고 교회 분열을 조장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고 섬기던 유대인들은 처음에 조상들이 전해 준 율법을 잘 지켰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율법을 지키는 것간에 갈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유대인들에게서 이방인들에게 넘어가3)자 유대기독교인들이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율법4)을 지킬 것을 요구하자 유대 기독교인들과 이방 기독교인들 간에 심한 다툼과 논쟁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로 하여금 결정을 보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가 초대 교회의 중요한 안건으로 상정 되여 이를 위해 예루살렘에서는 베드로와 야고보를 중심으로 하여 기독교 최초의 공의회를 시행합니다. 그리고 결론 내리기를 “우리가 이방인과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라고 선언을 합니다. 즉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만 첨부하기를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각 회당에 편지를 띄었습니다. 즉 율법의 구속력과 그 기능이 신약 시대에 와서는 상당 부분 종결된 것을 시인하는 내용으로 결론을 지은 것입니다.
통상 구약의 율법을 의식법(제사법)5), 시민법6), 윤리법으로 나눕니다. 이들이 다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으로 성취되었지만 , 성취되므로 그 기능이 정지되지 않은 법이 있는데 그 법이 윤리법 혹은 도덕법입니다.
오늘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먹는 문제는 어떠한 법과 관련이 있겠습니까? 의식법과 관련이 있습니다. 로마교회는 초대기독교의 교회이기 때문에 구약의 율법조항에 대하여 올바른 정립이 없었던 것으로 추론되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먹는 문제로 로마교인들 상호간에 알력과 다툼이 있었던 모양7)입니다.
그러한 상황하에 본문에서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어떻게 이야기 합니까? 믿음이 연약한자가 의심하는 바8)를 비판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즉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기 말고 먹지 못하는 자도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서로간에 왈가왈부9)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받으셨으며, 서고 넘어지는 문제는 하나님께 달려 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즉 하나님 편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을 사람 편에서 서로간에 흠집을 내면 제살을 깍아먹는 출혈경쟁밖에 없는 백해무익이란 말입니다. 로마교인들이 하나되여 갈길이 먼데 이러한 내부논쟁 즉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는 식의 논쟁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유대교의 전통에 서 있었던 베드로의 경우를 보면 이러한 과정이 더더욱 확연히 드러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도로서 사역을 감당하다가 어느 날 기도하러 지붕에 올라갑니다(행10:9-16). 점심 시간이 되어 사람들은 음식을 준비하고 있고, 베드로는 기도하는 중에 이상한 환상을 바라봅니다. 하늘이 열리며 보자기와 같은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봅니다. 베드로가 시장하였던 터라 그 안을 드려다 보니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것들이였습니다. 그러한데 주님은 베드로에게 명령하십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이 말에 베드로는 아연실색(啞然失色 뜻밖의 일에 너무 놀라서 얼굴빛이 변함)합니다. “주여 그럴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라고 고백하자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세 번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예증이 로마 교인들에게나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음식에 관한 지리한 논쟁이 무익함10)을 알게합니다. 그리고 서로간에 판단하지 말고, 업십여기지 말고, 상호간에 받으라는 것입니다. 교회안에서 진리에 위배되지 아니하는 이상 서로 받을 수 있는 포용성을 지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는 문제로 형제에게 근심을 끼치지 말며, 망케하지 말고(15), 모든 것을 사랑의 원리로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식물로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20)이 무너지게 말며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15)를 먹는 문제로 망케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고기와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는 것이 아름답다(21)고 이야기합니다. 즉 강한 믿음을 소유한 자가 한 발을 양보하고 또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도 악(20)하니 그들도 담대히 음식을 먹는 자들을 비방할 근거가 없으므로 같이 양보하라는 권면을 사도바울이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러한 권면을 통해서 우리는 어떠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까? 교회안에서 잡다한 문제들과 갈등상황이 찾아올 때에는 서로간에 한발 양보하고 복음의 진보와 선교를 위해서 한발씩 양보해야 됨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이러한 교회의 논쟁을 뛰어넘어 좀더 수준이 높은 공동체가 될 것을 이야기합니다. 17절을 다같이 주목하여 봅시다.
하나님의 나라 즉 신앙공동체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공동체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요 궁극적인 것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필요함11)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대한 결론을 맺겠습니다. 초대 기독교 사회 내에서는 구약의 부정한 음식과 정결한 음식 그리고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상당한 갈등이 있었습니다. 유대교적 신앙인들은 우리가 살핀대로 안티오쿠스 시대의 순교자들과 같이 부정한 식물과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는 것이 신앙의 전통주의라고 주장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구약의 제사법들이 완성이 되었고, 특히 의식법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종결을 보았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구약의 성도들을 제약하고 구속하였던 율법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그 기능이 종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식을 가지고 신앙 생활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모든 것을 먹을 만한 강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교회내에서는 이러한 지식을 갖지 못한 자들과 가진자들 사이에 상당한 갈등이 있었으니 사도바울은 오늘 이러한 갈등을 가진 양진영에게 어떻게 주문합니까? 한발씩 양보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진정 신앙의 공동체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본질이 아닌 성령 안에서의 삶이 참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수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교회들은 저마다 문제에 문제를 가지고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그리고 심하면 분열되고 갈라섭니다. 오늘 로마 교회 내의 문제를 바라보고 그 치유책을 제시하는 사도바울의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어떠한 예방책을 발견하게 됩니까? 성도와 성도간에 영적인 갈등이 있을 때에 그리고 목회자와 성도간에 알력이 찾아올 때에 진리가 아닌 이상 양보의 미덕을 발휘해야 할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문제를 사랑의 원리로 해결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15). 또한 갈등과 알력의 지평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 우리가 추구하는 신앙공동체는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민족 고유의 명절을 맡고 있습니다. 분명한 원칙은 제사상에 절하는 것은 기독인에게 허용될 수 없는 것이 만고불변의 법칙입니다. 그러나 그 음식에 관하여는 두 가지의 가능성이 믿는 자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그 중에 한가지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나왔으니 먹을 수 있다는 적극적인 사고방식과 믿음이 있는 자는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그러한 음식에 관하여 만에 하나라도 거리낌이 있어 소극적인 마음을 가진 자는 악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중히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 사도바울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오늘 이야기한 두 가지의 내용중 하나를 받아들여 우리의 마음을 정할 수 있는 결단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우리 신앙 공동체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본질이 아닌 성령 안에서의 삶이 본질이란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성취된 율법에 우리의 생명을 걸지 아니하고 여호와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생명을 걸어야 할 때입니다.
1) 고전13:11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2) 이들이 채식만을 고집했던 것은 로마의 시장에서 사오는 고기에는 우상에게 제물로 바쳤던 것이 섞여 있을지도 모르며, 무심코 그것을 먹었다가는 우상에게 오염되어 더러워진다는 생각 때문이였다.
3) 행10: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행11: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4) 행15:5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5) 의식법에 있어서 그 본질과 정신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실천되어야 할 요구로서의 기능이 여전히 있습니다. 1559년에 칼빈이 초안한 불란서 신앙고백서에 기초해서 1561년에 작성된 화란 신앙고백서 25조에서는 율법의 의식과 규례들은 그리스도의 오심에서 그쳤고 모든 그림자들은 성취되었다, 그래서 그것들을 사용함은 그리스도인 가운데서는 폐기되었다. 그러나 그것들의 진리와 실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의식법의 본질과 정신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 실천되어야 할 요구라는 것입니다
6)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의 국가 생활을 규정하고 제재한 시민법은 그대로 다 통할 수 없는 면이 많으므로 지금 상황하에서는 국가의 법으로 고집할 수가 없습니다.
7)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5. 식물을 인하여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본문에 판단이란 언어가 네 번 기록.
8) διαλογισμων 추론, 생각, 의견, 거리낌, 주저함 등으로 번역가능.
9) 히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10) 고전8:8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관하여 어떠한 사람은 우상이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알기에 이 지식을 가진 사람은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었으나, 어떤 이는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만일 식물이 헹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고전10:20-21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
11) 의는 성도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말합니다. 평강은 그리스도의 속죄하심을 믿을 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희락은 성도가 삶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평강한 관계를 누리는 성도의 정서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영혼의 기쁨을 의미하며 성령 안에서 다른 사람과 교제하면서 나오는 성도의 삶 전분야에 깃들어 있는 총제적인 기쁨을 말합니다. 본래 구원의 기쁨은 그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반드시 다른 성도와의 참다운 사귐에서 오는 기븜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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