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설교본문

시23:1 목자와 성도와의 관계

아론33 2009. 3. 16. 19:28

목자와 성도와의 관계


본문 / 시편23:1에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목자와 성도와의 관계를 외면상으로 보면 간단한 것 같으나 그 내면을 바라보면 단순한 것만은 아닙니다.  목자와 성도와의 관계를 조명하려면 가장 먼저 진리의 가장 완벽한 계시인 성경을 참고하지 않으면 그 어떠한 말도 공허할 것입니다.  그러함으로 이 시간 성경이 밝은 조명 아래에 목회자와 성도와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목회자와 성도와의 관계를 구약에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로 볼 수 있고,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시편23장에 그려진 목자 되신 하나님과 성도 된 다윗과의 관계에서 살펴보기로 합니다.

  본문에 다윗은 여호와를 목자로 고백합니다. 본문에 목자란 히브리어로 ‘라아’라는 동사에서 나온 분사형으로 ‘로에’라고 합니다.   ‘라아’라는 말은 ‘풀을 먹이다, ~을 돌보다’라는 의미로서 목자는 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양들이 그 먹이에 부족함이 없어야하며, 또한 영적인 결핍으로 인한 갈급함도 없어야 함을 전하고 있습니다.   시23:1에 목자와 양 사이의 관계가 가장 이상적인 모델로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양들을 먹이는 것이 사명입니다.  우리가 목자와 양 사이의 이상적인 모델을 실현하기 위하여 해야 할 일들은 무엇입니까? 

  

  가장 우선적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연구하여야 합니다. 


시편111:2 “여호와의 행사가 크시니 이를 즐거워하는 자가 다 연구하는도다”  

 

  본문에 연구한다는 말은 학습한다는 말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행사 즉 하나님의 구원적인 행위를 자신의 모든 삶의 행위와 사역으로 받아들이는 삶이 학습이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자신의 목회현장에 적용하는 것이 바로 연구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이론적이기보다는 다분히 실습적인 면이 강조된 용어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 몸으로 연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가 전하는 말씀이 생명이 있고, 성령의 역사가 수반 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영적인 결핍과 갈급함에서 놓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많은 젊은이들이 영적인 기갈(암8:11)에 허덕이다 못해 교회는 젊은이들이 없는 영적인 공황상태에 있으며, 결과적으로 교회는 급격히 노화현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여러분 말씀이 없이 인기에 영합하고, 말씀이 없이 한 시대의 이목을 이끌어 교회의 부흥을 도모할 수는 있겠으나 그러한 부흥은 부흥이 아니요, 인간의 열정에 불과합니다.  진정으로 말씀이 흥왕해야 교회가 든든히 서가는 것입니다(행9:31, 12:23, 19:20).  오늘 목회자로 부름 받은 우리들은 말씀을 연구하기로 에스라와 같이 작정해야 합니다. 


 스7: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더라” 


  본문에도 연구한다는 말씀 다음에 ‘준행한다고 기록 되여 있는데 이는 연구의 목적을 분명히 한 표현으로서 말씀을 이론화 시키겠다는 뜻이 아니라 반드시 지키고, 자신의 삶은 물론 청중들의 삶을 말씀으로 이끌어 내겠다는 확실한 목적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이를 볼 때 우리 목회자들의 목회적 연구는 책상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 반드시 복음의 현장 즉 필드가 있어야 그 말씀이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요한이 주님의 성육신 사건을 보고 다음과 같이 기록한 것과 같다할 것입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러분 은혜 충만, 성령 충만을 원하십니까?  여러분이 연구하시는 말씀이 삶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때에 비로소 은혜 충만한 사역자요, 성령 충만한 사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도 행하시면서 가르치셨으니 그 가르침이 생명이 되었던 것과 같이 우리도 행하면서 가르쳐야 성도들이 따라올 것입니다(행1:1).


    두 번째로 목회자는 성도들 앞에 있는 영적인 유혹을 제어할 수 있는 분별력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행20:28-31 “ 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참고 겔34:1-10)


  우리 모두는 교회가 과거나 현재는 물론 다가올 미래에 까지 이단 사설과 귀신의 가르침으로 인한 유혹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이 사역할 당시의 교회에도 흉악한 이리가 교회에 들어와 양 떼를 유린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 주변에는 이만희의 신천지, 박무수의 4단계 구원론, 안상홍의 하나님의 교회, 박옥수의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은 물론 이름조차도 낯선 이단들이 성도들의 영혼을 사로잡으려고 굶주린 사자와 같이 배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헤아려야 합니다.


  본문에 이러한 영적인 유혹이 있을 때에 사도바울이 권면한 말씀은 ‘자기와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라고 합니다.  ‘삼가라’는 말은 ‘주시하고, 주의를 기울이라’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영적인 분별력이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미혹하는 영이 자신들의 논리로(딤후4:1) 접근할 때 제아무리 지성이 높고, 재력이 있고, 직분 있는 성도들이라 할찌라도 그 미혹의 영을 조직적으로 대항할 믿음의 논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음을 주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본문 30절에 ‘어그러진 말-타락하게 하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나면 그 언어로서 미혹된 자들로 하여금 영적인 타락을 맛보아 주님 앞에 돌아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에 우리가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단에서 우리 기독교에게 오는 경우가 많습니까?  아니면 우리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가는 자들이 많습니까?   시대가 몹시도 악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들은 이들을 대적할 수 있는 영적인 분별력을 갖지 아니하고서는 우리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양떼들을 돌볼 수 없는 것이 우리 목회의 현장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별력을 키우기 위해서 우리 목회자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본문에 보면 사도바울이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서 훈계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일시적으로 한두 번 가르치고, 경고한 것이 아니라 중단함이 없이 밤낮으로 그 위험과 경계의 끈을 놓지 아니하고 계속하여 경고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타락의 길로 갔을 때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고 보내셨던 것과 같이 우리도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주님의 교훈에 착념하는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치 우리 아이들이 밖에 차도를 건널 때 부모 된 우리가 차 조심하라고 권면하듯이 한 순간도 긴장을 끊을 놓지 않고 눈물로서 간절하게 성도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도들로 하여금 영적인 분별력을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할 때 교회는 온갖 해로운 유혹에서,  영적인 미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연구하였다면 성도들로 하여금 영적인 분별을 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그리할 때 튼실한 교회로 세울 수 있고,  건강한 성도로 세울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세 번째 우리 목회자는 참 목자 되신 예수님과 성도들의 사이를 이간질 하는 자가 아니요, 아름답게 중매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삼하15:1-6, 고후11:2). 


  우리는 누구에게나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유혹은 지도자인 우리 목회자에게 달콤한 유혹과 같이 매우 강렬하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유혹의 구체적인 모습이 바로 ‘자기를 암시’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교육하고 양육하는 성도들에게 은혜나 은사적인 역사가 나타날 때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기 쉬운데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주신 은사를 도적질하는 행위가 됩니다.

  구약에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과 성도들의 대표적인 모형입니다.  이 모형적인 관계에 압살롬은 자기의 영향력을 배가하기 위하여 성도들의 마음을 도적질한 모습이 삼하15:1-6에 기록 되여 있습니다.

  압살롬은 다윗을 도와 다윗을 통한 하나님의 신정통치가 아름답게 구현되도록 하는 역할이 그의 주된 업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를 이간질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를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부각시키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는 모습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삼하15:5-6 “5. 사람이 가까이 와서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입을 맞추니  6.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하니라”


  여러분 성도들의 마음을 도적질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성도와 여러분들과의 관계는 공적인 관계이지 사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사사로이 접근하여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주입하는 자기 암시를 통하여 마음을 도적질하는 것은 이단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결코 우리 목회자들은 이러한 행태를 보여서는 안 됩니다.  행여나 여러분이 많은 은혜를 끼치고,  많은 감화를 끼쳐 여러분을 신뢰하고, 따르는 성도들이 있다할 지라도 목회적인 윤리가 깨어지지 않도록 날마다 자신을 돌아보고, 행여나 성도들의 마음을 도적질하지 않았는지 스스로 자기 진단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말은 어떠한 의도의 말인지 여러분 스스로가 잘 아실 것입니다.

  대신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울의 모델을 따라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자각하고 다음과 같이 자기의 사역에 대하여 고백합니다.


  고후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사도바울은 압살롬과 같이 자신의 열정을 가지고 목회사역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목회에 헌신하였습니다.  자신을 청중에게 암시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을 끊임없이 계시하여 하나님의 열정이 성도들의 가슴에 머물도록 하고는 자신은 제2, 제3의 존재로 빠지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이 목회에 전권을 행사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전권이 성도들의 가슴에 행해질 수 있도록 중매하였다고 기록합니다.  본문에 중매하였다는 말은 ‘결합시키고, 연합시켰다’는 말로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목회사역의 핵심적인 사역임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목회철학이 제아무리 높다할지라도 그 목회방법에 인간의 욕심이 만에 하나라도 개입된 것이 있다면 과감하게 수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그곳에 하나님이 주장하시고,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는 은혜가 있을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양떼를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시기 바랍니다.


  잠27:23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 마음을 두라”


  이 본문이 70인역에서는 형편이 숫자로 나옵니다.  즉 숫자를 염두 해 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오늘의 목회현실입니다.  우리가 양육하는 성도들은 반드시 숫자가 늘어나도록 해야 사역자이며, 목회자입니다.  초대교회는 날마다 구원받는 자의 수가 더해지는 역사가 있었고,  주님도 종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하셨습니다.


  눅14:21-23 /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심지어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든지 숫자를 늘리도록 목회에 전념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를 양육하는 것을 성경적으로 하되 전도는 모든 지혜를 동원하여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말고 지혜를 주시는 대로 순종하여 시행하야야 할 지상 대명입니다.  이것이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는 것입니다.   야곱 목사가 자신의 양떼를 늘리기 위하여 지혜를 동원하였듯이 우리들도 우리의 지혜를 동원하여 양의 숫자를 늘리도록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타당합니다(창30:37-43).  이 말은 언뜻 오해의 소지가 있는 듯 하나 결코 그러하지 않습니다.  오늘 교회의 숫자가 줄고 있다는 것은 전도에 게으른 사역자들 때문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기 바랍니다.  이 말은 양떼의 형편을 살피지 않은 결과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원활할 때는 그들의 인구가 늘었지만 원활하지 못할 때에는 그들의 인구도 줄었다는 사실이 반증합니다.


  오늘 우리 21세기 목회현장은 참으로 어려운 시대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  그러나 우리 목회자들이 말씀을 연구하여 행하여 가르치면 그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오늘 또 우리 주변의 영적인 환경이 그리 녹록치 않아 이단들이 득실 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말씀에 바른 가르침과 경고의 나팔 소리가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 성도들이 그 음성을 듣고 분별하여 안전하게 믿음 안에서 거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들을 우리의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도록 우리는 공적인 관계로서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결코 우리가 은혜를 끼쳤다 하여 그들에게 우리 자신을 압살롬과 같이 암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살펴본 바대로 양들의 숫자가 늘 수 있도록 온갖 지혜를 동원하는 일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시대임을 알아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까지 바른 충성, 바른 심성, 바른 영성, 바른 열심을 가지고 살아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벧전5:1-4 /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다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