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생수 되신 예수님

아론33 2009. 3. 17. 19:56

 JOHN9  요4:1-18  생수 되신 예수님.


  물은 인간이 존재하기 위한 필수품입니다.  한때는 에너지가 고갈될 것을 우려하여 많은 사람들이 염려하였지만 에너지는 대체할 수 있기에 근본적인 삶에 위협을 가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물은 그 어떠한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기에 앞으로 물 부족으로 인한 삶의 위협은 날마다 가중되리라고 전문가들이 진단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물을 중심으로한 사마리아 여인과 주님과의 대화에서 우리는 주님이 생수가 되심을 알게됩니다.   이 생수 되신 주님이 오늘 누구에게 필요한지, 그리고 주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어떻게 하면 그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생수가 필요한 사람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유대 땅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셨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세례요한이 주님의 사역 앞에 얼마나 겸손하였으며, 주님을 환영하고 기뻐하였는지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의 고백1)과 바램과 같이 오늘 본문1절과 2절에서는


  1-2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 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준 것이라”


  고 기록이 되었습니다.   본문에서도 세례요한과 대적하였던 바리새인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맨 처음 이들은 요한의 세례열풍이 팔레스타인을 진동시키자 그에게 경계심을 갖고 찾아와 “네가 누구냐”고 물으면서 그리스도가 아닌가?  엘리야가 아닌가?  구약의 백성들이 기다렸던 그 선지자가 아닌가?  물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모두 아니라고 대답한 뒤에 단지 자기가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고 대답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일시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도 역시 예수님도 세례요한과 마찬가지로 바리새인들로부터 경계의 대상이 되셨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를 삼고 세례는 주는 일이 요한 보다 많게 되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무척이나 경계하였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주께서 아셨음으로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방향을 바꾸십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여정을 바꾸신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이르기 전에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과의 무모한 충돌을 피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이미 주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부패한 성전을 척결하사 유대교 지도자들과 정면으로 충돌한 일이 있었습니다. 더우기 주님은 많은 이적을 베푸셨을 뿐 아니라 이제 세례와 말씀을 많은 사람들에게 베푸시자 유대교의 총본산 이라 할 수 있는 예루살렘의 종교적 기득권자들에게는 분명 커다란 도전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 여정을 바꾸신 이차적인 이유는 소외 받는 무리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뿐 아니라 그들 외의 모든 이방인 무리들도 당신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눅19:10). 

  예수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유대를 떠나 사마리아를 거쳐 갈릴리로 방향을 바꾸신 겁니다.  


  3-4절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 새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본래 예루살렘 지역에서 갈릴리로 가려면  두 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유대 땅에서 직접 북상하여 갈릴리에 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길은 대략 3일 길입니다.  둘은 사마리아를 피하기 위하여 요단강을 동쪽으로 건너, 북상하고 다시 요단강을 서쪽으로 건너서 가는 길입니다.  이 길은 대략 6일정도 걸리는 길입니다.  이러한 통행방법 중에 유대인들은 대부분 거의다 두 번째 통행방법을 선택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두 가지 길 중에 주님이 유대 땅에서 직접 북상하여 갈릴리로 방향을 의도적으로 정하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사마리아 지역에 소외된 사람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전통적으로 사마리아 지역 사람들과 유대인들은 가깝고도 먼 사이였습니다. 역사를 보면 주전 722년경 북방 이스라엘 열 지파 왕국이 당시에 세계의 주권자였던 앗수르 제국에게 점령당하여 많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고 살아 남은 자들은, 앗수르의 이민 정책의 희생자가 되어 이방인들과 어울려 살다가 점차 혼혈 민족을 이루었고, 종교적으로도 혼성 종교를 이루고 말았습니다(왕하17:24-33).

  그러자 남방 유다의 왕국도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게 점령 당하여 패망한 남방 유다 왕국의 살아 남은 자들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다가 자유를 얻어 돌아와 보니 북국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민족적, 종교적으로 변질된 것을 보았고 따라서 이방인들과 똑같이 멸시하고 짐승 같이 여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소위 사마리아인이라는 독특한 표현법이 생겼고, 따라서 그들을 순수한 아브라함의 혈통을 지닌 유대인들은 사람 대우를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갈등과 분열 양상이 복음서 중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복음서를 보면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상황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눅9:51-56).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도 그러한 깊은 갈등이 사마리아 여인과 주님과의 대화장면에 분명하게 드러납니다(9).


  오늘 주님은 그러한 갈등을 넘어 소외되고, 그늘진 땅으로 찾아가셨습니다.   역사적으로 단절된 지역을 찾아 생명의 복음을 증거 하시기 위하여 사마리아에 가시게 된 것입니다.   유대 땅에서 바리새인들과 소모적인 다툼을 피하고 요사이 유행하는 용어로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복음사역의 극대화를 위하여 사마리아의 소외된 지역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소외된 지역을 통하여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그 동네의 많은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하겠는지라 는 꼭 해야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말씀)2)으로 가신 것입니다. 


  우물가의 예수님


  예수님은 당신을 증거 하시기에 가장 합리적이고,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시었는데 그곳은 바로 야곱의 우물이 있는 곳이였습니다. 


  5-6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이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육체적 생명의 필수양식인 우물과 영혼의 생명을 위한 영원한 생수가 되신 예수님의 모습이 교차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 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고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 현실감 있는 소재를 사용하심으로 듣는 이로 하여금 그 의미를 쉽게 파악하고, 이해하고, 수긍할 수 있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사마리아에 오시게 된 이유는 수가성 여인을 구원하심으로 그 여인을 통해 수가 성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 주님은 초라한 여인을 마음에 두시고 일부러 그 길을 택하셨다는 사실은 참으로 주님께서 한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얼마나 비상한 관심을 두고 있는지 헤아릴 수 있습니다. 

  수가 성은 가버나움으로 가는 길과 나사렛으로 빠지는 길이 서로 갈리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예수님이 피곤하고 목이 말라 않으셨던 그 야곱의 우물은 그 성 사람들에게 생명의 줄과 같았습니다.  그 지방은 강수량이 적어서 온 성이 그 우물의 물을 마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우물은 참으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우물은 2000년 이상 사람들이 사용하였던 우물입니다.  우물은 수가 성에서 2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의 몸으로 무거운 물지게를 지고 왕복 4킬로미터 이상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항은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이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하여 전날 오후에 예루살렘을 떠나 그 다음날 정오까지 비지땀을 흘리며 그 뜨거운 사막 길을 걸어오셨다는 것입니다.  그 여인이 열두 시쯤 되면 물 길러 나온다는 것을 미리 아신 주님께서는 그 시간에 맞추기 위해 지체하지 않고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생수를 구해야할 사람


  이 때에 사마리아 여인이 주님께서 계신 야곱의 우물로 찾아오자 주님은 ‘물을 좀 달라’고 요청하십니다.  사실 주님께서 요청하신 물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요청해야 될 간구내용이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요청에 대하여 사마리아 여인의 의아해하면서 자기를 상대해주는 주님에게 깊은 관심을 갖게됩니다.


  7-9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물을 길러 나오는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것처럼 결혼을 다섯 번이나 한 부끄러운 경력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16-18).  이제는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 채 어느 건달과 동거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여인들은 남편을 여의면 재혼까지는 할 수 있었습니다.  삼혼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면 이 여자는 틀림없이 창녀나 다름없는 최하류의 인생을 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자연히 동네 사람들은 그를 따돌렸을 것입니다.   많아야 몇 십가구에 불과한 손바닥만한 동네에서 그 여인이 받은 수모는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누구 하나 찾아갈 사람도 없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을 했을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사람 만나는 것이 두려워 집밖으로 나오는 것조차 꺼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여인들이 물길러 다니기에 좋은 시간인 아침, 저녁을 가급적이면 피하고 아무도 잘 나오지 않는 뜨거운 대낮을 이용하여 얼굴을 폭숙인 채 먼 길을 걸어 도둑질하듯 물 길러 나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같이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도 만나주셨지만 주로 예수님이 마음에 두고 있었던 사람은 이사야61장에 나타난 사람들입니다3)


  오늘 이렇게 복음을 들어야할 사람들은(생수를 마셔야 할 사람들은) 수가 성의 여인처럼 대부분 세상적으로 말해 사람 대우를 못 받는 자들이요, 실패자들이고, 정서적으로 어딘가 잘못된 자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자들에게 생수를 먹이십니다.  주님의 생수를 마시면 오늘 말씀과 같이 다시 목마르지 아니하게 되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게 되며, 그 물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물이 되여 영혼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것입니다.


  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사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오늘 우리들은 이 수가 성 여인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모든 면에서 갖추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의 이야기를 들으면 옛날 동화를 읽는 것과 같은 생각이 들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들과 이 여인 사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공통점은 마음의 갈증입니다.  영혼의 갈증입니다.  돈을 아무리 벌어도 해갈이 되지 않는 갈증이 있습니다. 아무리 즐겨도 없어지지 않는 갈증이 있습니다. 

  이 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우린 예수님께 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주님의 말씀대로 그 생수를 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통하여 영혼의 갈증이 해소될 수 있는 것입니다.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주님은 우리 목마른 자들에게 생수를 주십니다. 세상의 양식을 위해서 우리는 많은 수고와 노력을 해야 하지만 주님의 생수를 마시기 위해서는 단지 듣기만 하면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혼의 갈증이 심화되거나 정서적인 불안이 심화될 때에 생수 되신 주님께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돈 없이, 값없이 나아와 주님께 엎드리면 영혼의 생수를 흡족히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4).


  오늘 수가 성 여인을 만나기 위해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걸음을 재촉하셨던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 주님은 우리에게 생수를 주시기 원하십니다. 오늘 야곱보다 크신 주님께서 영혼의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기 위해 우리의 마음에 문을 두드리십니다.  주님을 영접하시어 영혼의 양식을 얻어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과 동고동락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1)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2).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4). 


3) 사61:1-3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하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며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환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지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4) 사55:1 너의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