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35-51 제자들의 기독론
본서의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시점을 제자들을 부르는 일에서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은 그들을 통하여 주님의 몸된 교회를 준비 하시기도 하고 또한 제자들을 교육시켜 복음을 전 세계에 전하게 하시려는 계획하에 제자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이 부름심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산 증인이 되었고 초대 교회 형성의 모체가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명분이 이어져 많은 사람들이 세계 속에서 복음의 증거자로서 사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석가들은 본문을 가리켜 그리스도 교회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요한과 안드레와 같이 질문(38)을 통하여, 시몬과 같이 이름을 고쳐주시는 일(42)을 통하여, 빌립 같이 부르심을 받는 일(43)을 통하여, 나다나엘과 같이 의심을 풀어주시는 일(46)을 통하여 또한 그리스도께 향한 믿음의 고백하는 일을 통하여 교회가 자라고 성숙하여 져서 결국 전 세계에 교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특히 본문에 등장하는 단어중에는 ‘본다’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말합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36). 예수님께서 요한의 제자 둘이 좇는 것을 ‘보시고’ 물으신 다음에 말씀하셨습니다(38). (39)‘와보라’ 하셨고, 제자들이 계신 데를 보고 주님과 함께 거합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의 제자중에 안드레가 그의 형제 시몬을 예수님께 데리고 오니 예수님께서 보시고(42)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또한 빌립이 예수님을 좇다고 나다나엘에게 가서 ‘와 보라’(46)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나다나엘을 만나시고 그를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48)하시면서 놀라는 나다나엘에게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더 큰 일을 보리라’(50)하시고 또 모든 제자들에게 또다시 인자 위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흔히 본다는 것은 무엇에 대한 관점 내지는 시각을 확정지어 줍니다. 따라서 제자들의 입장에서 주님을 본 시각 그 관점을 가지고 제자들이 본 기독론에 대하여 생각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기독론이 우리에게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지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사도 요한과 안드레는 주님을 랍비로 보았습니다(35-39).
세례 요한은 성령께서 주님께 내려 머무시는 것을 보고 주님에 대하여 일찍이 증거하기를 ‘하나님의 아들(34)’이라 증거하였습니다. 본문에서는 두 제자에게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36)’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전날에 ‘그리스도는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29)’라는 말씀의 요약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말씀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는 말씀의 뜻은 ‘주님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속죄의 주 메시야이시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 증거를 통하여 자기의 두 제자를 예수님에게로 인도한 것입니다.
따라서 전에 세례요한을 따르던 사도 요한과 안드레는 이제 그들의 선생을 바꾸기에 이르렀고, 따라서 그들은 주님의 선구자의 지도를 받던 자리에서 이제 참 구주이신 주님에게 인도되게 된 것입니다.
사도 요한과 안드레가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좇자 예수님께서 좇는 것을 보시고 질문을 던지십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여기에서 구한다는 말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 구해야 할 것을 의미하는 동사로서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구원에 연관되어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질문은 ‘너희가 궁극적으로 찾아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즉 죄악된 세상이 참으로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대부분 불행하게도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정욕을 위한 것(요일2:16-17)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궁극적 가치와 숨겨진 보화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망의 소중함을 깨닫는 자들은 모든 가치를 모아 그 보화를 살 것입니다(마13:44 /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오늘 세례 요한의 두 제자는 다행스럽게도 주님 앞에 인도되여 주님을 랍비라 하여 참된 인생의 스승으로 알아 좇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거하는 복된 믿음을 가졌습니다. 여기 랍비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율법을 많이 배운 선생’이라는 뜻으로 원래는 위대한 인물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율법의 교사들에게 대화를 요청하기 위하여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두 제자의 질문을 통하여 그들이 인생의 지도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며 또한 겸손하게 말씀을 듣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의 선생님이십니다. 그것도 우리가 본 받아야할 참된 스승이십니다(요13:13-15 요14:6).
오늘 우리가 구해야 될 것이 많이 있지만 주님 앞에 나아와 세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구하고 주님과 함께 거하는 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인생의 스승도 우리가 믿고 존경하거늘 주와 선생되신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열심내여 우리도 사도요한과 안드레와 같이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겸손히 주님의 말씀을 듣는 신앙, 주님과 더불어 함께 거하는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2.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안드레는 주님을 메시야로 보았습니다(40-42)
안드레는 랍비되신 예수님을 만나고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가 말합니다.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41)’고 이야기 합니다. 이를 영어성경에 있는 표현으로 해석하면 ‘우리가 찾던 메시야를 발견했다(We have found the messiah)’입니다. 안드레는 조상 대대로 그토록 기다리던 대망의 메시야를 만나고서 그 놀라운 소식을 시몬에게 곧장 전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열강의 억압으로부터 구원해줄 메시야를 간절히 대망하였습니다. 유일 무이한 메시야에 관한 개념이 이스라엘 역사상으로는 대개 다윗 시대에 배태되어 신구약 중간기 말엽에 강렬하게 발흥하였다고 봅니다. 그러나 메시야 사상은 구약성경 전체에 걸쳐 풍부하게 계시되어 있습니다.
다윗 이전까지는 인생을 죄와 사망 가운데 빠뜨리는 사단을 멸하실 유일한 메시야 즉 창3:15의 ‘여자의 후손’에 관한 예언에서 시작되어 창22:18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씨’ 그리고 민24:17의 ‘한별’등도 유일 무이한 메시야에 관한 예언입니다.
그리고 왕정시대에 접어들면서 사울 왕이 기름부음을 받고 초대 왕으로 즉위하였으나 신정 왕국의 통치자로서 부적합하였습니다(삼상15:11). 따라서 하나님은 다윗을 택하사 당신의 통치를 대행케 하셨으며, 다윗과 언약을 맺으사 그 왕권을 영원토록 지속시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삼하7:16).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다윗의 왕권이 영원토록 지속되지도 않고 엄격한 의미에서 이상적인 왕도 나타난 적이 없게 되자 이에 대한 갈등에서부터 메시야를 대망하고 열망하게 됩니다.
따라서 다윗의 후손으로 나실 영원한 왕이신 메시야, 곧 왕적 메시야에 관한 사상은 여러 예언서들 속에서 더욱 심화되고 새로워진 모습으로 전개되어 나갔습니다.
그 중에 사9:6-7에는 평강의 왕이신 메시야가 예언되었으며, 그 외에도 이새의 뿌리에서 난 한싹(사11:10), 의로운 가지(렘23:5), 목자(겔34:23), 인자(단7:13)등으로 소개되었습니다. 특히 사53:1-9은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야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B.C.586년에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후로 예수님 당시까지 이스라엘은 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 등으로 이어지는 열강들의 억압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암담한 민족적 상황 속에서 그들은 정치적이고, 지상적인 메시야를 기다렸으므로 예수님의 이적적 권능을 거듭 목격하자 그들을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제자들(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이 왕으로 추대되면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않고자 소원하였습니다(마20:20-22).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역 초기부터 메시야적 권능을 밝히 드러내셨으되 스스로 오히려 신분을 감추시고(막3:12), 자신의 신분을 공개하심에 있어서도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사역을 강조하셨습니다(마16:21).
따라서 예수님께서 죄와 그로 말미암은 온갖 저주들로부터 인생을 구원하기 우해 오신 구세주라고 하는 참된 메시야관은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 및 성령 강림이후에야 비로소 확립되었던 것입니다(갈3:13). 그리고 메시야된 예수님을 신약성경에서 인자(막8:31), 하나님의 아들(막16:16), 구주(행5:31), 주(롬10:9)등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안드레가 메시야를 만난 감격을 그의 형제 베드로에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전한 것과 같이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메시야 된 주님을 이웃한 형제와 자매에게 전하는 믿음이 요구되어집니다. 오늘 우리고 메시야를 만나 감격이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 분은 사망의 세력에서 우리를 건져내 주신 참된 메시야가 되십니다. 그분은 우리 앞에 놓인 많은 죄악의 난관으로부터 구원하신 영원한 구세주요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복음을 듣고 공감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빌립과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았습니다(43-51).
세례 요한은 자기의 두 제자를 주님께 인도하였고, 안드레는 자기의 형제 시몬을 주님께 인도하였습니다. 빌립도 역시 주님의 부름 ‘나를 좇으라(43)’는 말씀에 주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 빌립이 친구인 나다나엘을 찾아가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45)’고 전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구약을 ‘율법’이라고 부르기도 하였고 ‘율법과 예언’이라고도 부르며, 때로는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눅24:44)’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런데 오늘 45절에서는 구약을 두 부분으로 불렀는데, 구약을 율법과 예언서로 보았던 것입니다.
빌립이 그이(메시야)를 만났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나다나엘이 무척이나 반기다가 그 메시야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는 말을 듣자 곧 실망하고 맙니다. 그래서 그는 빌립에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한 것입니다.
그 당시 나사렛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주 천시되는 마을-달동네, 왕십리(왕십리에도 사람이 사느냐? 쓰레기와 인분을 내어다 버리는 고장-이였습니다. 이유는 이 마을 사람들이 무식하고 성질이 괴팍하며 다른 도시의 문화적인 주민들과는 비교(정신적, 문화적, 지식적)가 안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한 지형적으로도 이 마을은 작고 고립되어 있는 곳인지라 유대 사회에서 나사렛을 별로 중요하지 않을 마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오늘 나다나엘이 자기를 전도하는 빌립에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라고 되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다나엘의 질문에 빌립은 ‘와 보라’고 말합니다. 빌립의 초청에 나다나엘이 주님에게 다가갑니다. 주님은 그를 보시고는 말씀하시기를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속임수, 간교함)이 없도다(47)’에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갖고 있으며 그 언약을 믿고 있을 뿐 아니라 언약의 성취를 소망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하기에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적이 없고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 마음을 의지하였기에 간사함이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나다나엘은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48)’에 되 묻습니다. 이 말에 주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당시에 무화과 나무는 팔레스틴 지역에 번성하였던 나무로 그 잎이 커서 그늘을 드리울 수 있었기에 당시의 랍비들은 율법을 교육하거나 묵상하는 장소로 사용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무화과 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나다나엘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율법을 묵상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말에 나다나엘이 주님 앞에 감격하여 말하기를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임금은 메시야의 다른 이름입니다(시2:6,7).
하나님의 아들 즉 인자(주님의 표현)은 어떠한 일을 하시는 분입니까? 그 분은 우리의 중보자 되십니다. 본문 51절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심으로 그 분의 사역의 특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죄 많은 인간 사이에 사다리가 되십니다. 참 하나님이시오 참 사람이신 주님만이 유일한 중보자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지어 주고 화해시켜 줄 수 있는 이는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인자이신 주님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중보사역에 천사들의 도움이 필요하였는데,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리라는 말씀이 이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사실 주님께서 사역을 하실 때에 보면 천사들의 도움이 간간히 나타납니다.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후에 천사들이 수종들었습니다(마4:11),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천사가 내려와 주님께 힘을 도왔습니다(눅22:43), 부활 후에 두 천사가 나타납니다(요20:12). 승천하실 때 역시 두 천사가 주를 모시고 갑니다(행1:10). 그리고 세상 마지막 종말에 재림하실 때 천사장의 소리와 함께 강림하신다고 합니다(살전4:16).
오늘 나다나엘은 주님을 중보자 즉 하나님의 아들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이 우리의 중보자 되심을 믿고 그분을 의지해야 하겠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중보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롬8:34). 그러므로 우리 인생가운데 환난과 곤고, 위험을 만나거든 주님의 중보하시는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선생님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아는 만큼 따랐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구약 예언의 성취자 즉 대망의 메시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분 안에서 죄사함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아 참된 중보자의 사랑안에서 변함없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충성하는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을 인생의 지도자로 섬기고, 그리스도로 섬겨 죄의 유혹에서 승리하고,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따라 우리에게 찾아오는 온갖 난관들을 극복하는 역동적인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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