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8 요한복음 3:22-36 낮은 사람이 진리를 밝히 봅니다.
자기 PR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있어서 겸손이란 미덕의 의미와 필요성이 점차 퇴색되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겸손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 중의 하나가 남을 자기보다 높일 때 찾아오는 기쁨보다 자기에게 우선적으로 찾아오는 모멸감과 굴욕감에 지배당하기 때문에 겸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자세입니다. 사람들을 향하여는 신분의 고하에 상관하지 않고 타인을 존경하거나 높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세례요한의 겸손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자기의 사역을 통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비워서 그리스도를 높였습니다. 우리는 세례요한의 이러한 겸손을 통하여 그 겸손이 어떻게 사용되어질 수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사역을 통해 겸손했던 사람, 자신을 올바로 직시한 인물 요한(22-28).
요한이 하나님 앞에서 사역했던 주된 일은 세례였습니다. 세례는 물로 씻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의 부정함과 죄악을 씻는 의식입니다1).
신앙생활 함에 있어서 가장 인상적인 것이 있다면 세례예식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새신자를 제외하고 대부분 세례를 받은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세례를 받았던 사람은 자기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목회자를 잊지 않습니다.
저 또한 1986년 12월 25일에 김영남 목사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는데 그 때의 감격과 눈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교회를 돕는 용현중앙교회의 목사님은 당신에게 세례를 베푸신 목사님에게 해마다 감사의 말씀을 전화로 드린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세례는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인상적인 예식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또한 세례를 베푼 자와 받은 자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설정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 때문에 고린도교회가 몸살을 앓은 적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세례를 베푼자를 중심으로 성도들이 분열 되여 대치한 일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분열과 마찰이 합당하지 아니하며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당부합니다(고전1:10-15)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오늘 본문에 나타난 두 지역의 세례장면이 범상하지 않은 기류가 형성됨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한 장면은 예수님께서 유대 땅을 중심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장면(22)이 나오고, 또 다른 한 장면은 요한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는 장면(23)이 겹쳐 나옵니다.
22 /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
23 /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당시에 세례는 요한이 주도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감당하였던 사역이였습니다. 요한 앞에 세례라는 단어(마3:1)가 붙을 정도라면 요한의 주된 사역이 무엇이었나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에 대한 언급이 사복음서에 다 나타나는데 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마3:5).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의 성격은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막1:4)2). 사람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음으로 속에 응어리졌던 죄악의 고통과 슬픔은 치유할 수 있었고, 다른 사람에게 조롱과 비웃음을 유발시켰던 죄악의 수렁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세례요한의 사역의 범위에는 성역이 없었습니다. 세례요한은 당시에 기득권층이라 할 수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마3:7-8)”고 외칩니다. 또한 세리와 군병들에게도 거침없이 정한 세만 거둬들일 것과 강포하지 말고 판결을 굽게 하지 말고, 부정과 비리를 일삼지 말라고 외쳐댔습니다(눅3:11-14). 그의 이러한 외침은 억압받던 민중의 가슴에 일종의 정화작용을 하였습니다. 그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세력들 앞에 잘못을 외치고 회개하라고 하는 그의 음성을 백성들의 지도층에 대한 원망과 불만을 일거에 몰아내는 폭포수와 같은 정화작용을 하였던 것입니다.
당시에 요한으로부터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과 그를 아끼는 모든 백성들이 한결같이 요한을 바라고 기다리게 됩니다(눅3:15)3). 그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세례사역의 결과였습니다. 이러한 백성들의 반응은 당시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불었던 요한 열풍(한류 열풍)이 그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요한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백성들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았고, 청결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사역의 목적을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역의 목적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는 것이였습니다(요1:31)4). 그렇기에 요한은 자기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사역과 충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일 세례요한이 자신의 세례사역에 대한 성격과 목적을 깨닫지 못하였었다면 오늘 본문과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의 사역에 얼마나 누가 되었겠습니까?
오늘 그러한 염려가 현실로 등장할 수 있는 일이 발생합니다. 24-25절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24 /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25 /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그 동안 요한만이 세례를 베풀었는데 그 세례가 이제 독점적으로 베풀어지지 아니하고 되리여 한 유대인이 예수님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요한의 세례보다 우월하다는 식의 변론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만일 요한이 옥에 갇혀 세례 사역을 감당할 수 없었더라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인데 요한이 옥에 갇히지 아니한 상태에서 세례가 유대 땅에서 대대적으로 베풀어지니 심상찮은 일이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심한 불만을 표시하고 자기네들의 스승의 권위가 꺾이는 양 요한에게 와서 그 서운함을 26절에 이야기합니다.
26 /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 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이 말의 뜻은 이제 당신의 시대는 가버렸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당신만을 고대하고, 바랐는데 이제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 우리의 모습이 보잘 것 없고 초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당신 곁에 머물러 있는 것이 자랑스럽고, 보람스러운 일이였는데 이제는 아무것도 아니게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떠한 대안을 마련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다가는 당신의 명성은 이슬같이 사라지고, 우리의 존재의미마저 머지 않아 사라질 것이 아니겠느냐는 자조석인 말을 세례 요한에게 전달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판단한 부정적인 상황과 세례요한이 판단한 상황은 전혀 달랐습니다. 세례요한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제자들의 실망스러운 반응을 다음과 같은 말로 잠재웁니다. 27절-28절을 읽읍시다.
27 /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28 / 나의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우리는 세례요한의 이러한 말에서 그의 겸손함과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한은 그간에 자신의 위대한 사역이 하나님이 허락하였음으로 감당한 사역이였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였다고 말합니다(27). 되리여 그간에 일어났던 요한열풍(요한신드롬)의 주역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였다고 자신을 낮춥니다. 그리고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다시 못을 받습니다.
즉 자신은 단지 일개 사람에 불과할 뿐이라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춥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높이고, 자신의 쓰임 받았을 뿐이란 사실을 내세웁니다. 그리고 자신의 제자들이 할 일은 주님의 사역에 갈등을 일으키고, 예수님의 세례사역에 소모적인 경쟁을 벌일 일이 아니라 주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가 세례요한이라고 증거할 자가 너희들이니 주님과 견줄 생각을 하지 말라고 일침을 놓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교회라는 동일한 무대에서 얼마나 서로가 견제하고 소모적인 경쟁가운데 신앙 생활하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교회의 비극입니다. 목사와 목사간에 알력이 존재합니다. 성도와 성도간에 알력이 있습니다. 성도와 목회자 간에 알력이 있습니다. 교회와 교회간에 깊은 상처와 알력이 존재합니다. 이렇게 소모적인, 제살깍이식의, 누워서 침뱉기식의 부끄러운 다툼이 있는 것은 세례요한과 같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자기를 비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례요한과 같이 자기를 비우고, 자기의 위치를 올바로 깨달아 갈등이란 불에 휘발유를 쏟지 말고, 논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세례 요한과 같은 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세례요한과 같은 칭찬을 얻게 됩니다(마11:11)5)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은 갈등을 치유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를 올바로 파악합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만이 주님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겸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의 역할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29-30).
29-30 /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커져야 하리라, 많아져야 하리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보다 못해져야 하리라, 수가 줄어야 하리라) 하리라 하니라.
히브리인들의 관습에 따르면 신랑의 친구는 신부를 골라서 중매하고, 성사가 되어 결혼을 하게되면 결혼 당사자들에게 선물을 가져다주고, 신랑을 신부에게 인도하여 그 결혼식을 도와주며 결혼식이 끝나 신랑이 신부를 맞아 기쁨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면 바로 이 때에 신랑의 친구가 자기의 사명을 다한 것으로 알고 신랑의 친구로서의 기쁨을 만끽한다고 합니다.
세례요한은 신랑이 신부를 취하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는 것과 같이 자기의 역할을 다한 것에 더없는 기쁨을 느낀다고 이야기합니다.
구약에는 가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를 부부로 묘사하였고(아5:1,6;사54:5;62:4; 호2:19), 신약에서도 주님과 교회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로 표현합니다(마25:1-13;막2:19;엡5:24;계21:1,2).
그런데 신약에 사도바울이 신랑(예수님)과 신부(예수님의 백성) 사이의 중매역할을 함으로 자기가 중매(고후11:26))한 교회들이 아름답게 신앙생활할 때 무척이나 기뻐하였고, 즐거워하였습니다. 오늘 세례요한이 말한 기쁨은 아마도 그러한 기쁨이 아니였나 생각되여 집니다.
왜냐하면 본래 자기의 사역의 목적이 주님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나게 하는 일이 주된 사역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사역이 다해 감을 느끼고 이제 주님만이 역사의 무대 전면에 나서서 활동하셔야 됨을 당연시하고 있는 것입니다(30). 세레요한이 주님 앞에 겸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기의 역할과 한 개를 분명하게 인식하였기 때문에 겸손하고 충성스러운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저마다 가정과 교회에서 주어진 역할이 있습니다. 세례요한과 같이 주어진 역할을 다하였을 때에는 한 걸음 되로 물러서는 여유와 사려 깊은 배려가 필요합니다.
세례 요한은 마지막으로 신명을 다하여 주님을 높입니다(31-36).
아마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섭섭한 생각이 가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주님의 절대성에 대하여 증거 합니다. 세레요한은 주님을 위로부터 오시는 이, 하늘로서 오시는 이, 만물 위에 계시는 이로 묘사(31-32)하여 주님께 비길 존재가 자신을 비롯하여 지상에는 아무도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요한이 비록 세례 줌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영적인 감화를 얻고, 은혜를 받고, 내적으로 치료 되였고, 민중들의 가슴에 정화작용을 일으켰을 지라도 세례요한 자신은 주님과 비견할 수 없을 뿐 더러 인생 그 누구도 주님과 비견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요한은 주님을 참된 증거 자로 묘사합니다. 주님의 증거 내용이 하나님의 참된 말씀인데 그 증거가 참된 이유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고 하여 성도들이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의존하고, 복종해야 됨을 말합니다.
세례요한은 높은 권위를 말합니다.
35-36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 말씀은 시편 제2편의 배경입니다. 시편 2편은 메시야시로 유명한데 그 중심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소유를 다 얻어, 철장으로 질그릇을 부수듯이 지배하게 하시고 당신을 믿게 하려 하시는데, 만약에 믿지 아니할 때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급하게 임하실 것을 전하고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다 복(영생)을 받게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구원과 심판권 그리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까지 다 주셨으니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인간의 정당한 길이라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뜻과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에게는 이러한 권세나 영광이나 특권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이 주님을 절대적으로 높이고 자기는 주님의 사역에 비견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겸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세례 요한은 참으로 하나님 앞에 낮은 사람이였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였기에 사역을 하면서 주님을 높이였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명성을 주님을 위해서라면 초개와 같이 버렸습니다. 그리고 되리여 자기의 명성이 떨어질 위기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고 도리어 주님을 마음껏 환영하고, 주님이 더 높아져야 될 이유들을 제자들에게 설명하였습니다.
우리들도 세례요한과 같이 낮은 사람이 되어 교회에서 세상에서 갈등과 대립의 상황 속에서 같이 휩싸이지 말고, 화해하는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설령 많은 사람들의 칭찬이 우리들에게 주어질 지라도 그것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사역이 무엇인지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을 통하여 주님을 높일 수 있는 삶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높일 수 있는 겸손을 하나님은 귀하게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1) 롬6:3-4 /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2) 막1:4-5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3) 눅3:15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4) 요1: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5) 마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6) 고후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히 너희를 위하여 열심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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