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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사

아론33 2009. 3. 16. 17:02

                                     종교개혁사


         1. 종교개혁의 요인


     영어로 종교개혁을 Reformation이라 한다.  1517년 루터가 95개조의 항의문을 빗덴베르그의 교회 정문에 게시할 때 종교개혁의 결정적 계기가 이루어졌으나 개혁 운동은 훨씬 그 이전부터 일어나고 있었다.

     

    1] 도덕적인 요인-루터가 속죄권 판매를 정당시한 텟젤과의 대결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은 늦어졌을는지 모를 일이다.  교회가 신령한 축복을 돈 받고 파는 장사를 하면서도 그것을 합리화시키려 할 때 루터의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속죄권 판매 외에도 성직 매매가 성행되었다.  게다가 신부들의 독신생활이 해이하여지고 문란한 도덕 생활이 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2] 지적인 요인-르네상스는 유럽의 지적인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고대 문화에로의 복귀, 개인주의적 각성, 지리상의 발견에 따라 동서 문화의 교류, 봉건제도의 붕괴에 뒤따른 상업 인구의 격증, 스콜라 철학의 퇴조와 함께 득세한 옥캄주의의 득세, 이 모든 것들이 중세의 사상적 기초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3] 사회적인 요인- 십자군 운동 이후 봉건 사회가 점차 무너지면서 상업의 발달로 농업 경제가 상업 경제로 옮겨지는 과도 과정에서 사회의 구조적 변화가 생겨졌다. 또한 국가주의의 등장으로 스페인과 프랑스에서는 교회가 국가의 지배 아래 들어오게 되고 교황청의 바빌론 포로로 인한 교황 위신의 실추는 교회 개혁을 부채질하였다.


         2. 루터의 종교개혁


    1517년 10월 31일에 무명 수도사 교수의 의하여 던져진 항의는 자신도 놀랄 만큼 역사적인 사건이 되고 말았다. 종교개혁의 계기로서 항의의 봉화를 올린 사람은 바로 마틴 루터였다. 그는 당대에 종교적 지도자도 아니었고 조직과 정치에 탁월한 인물도 아니었다. 다만 깊은 종교적 체험과 신학적 확신으로 신앙적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시골의 수도사요 무명의 신학자였다. 

    그는 1483년 아이스레벤 시골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장차 법률가로 만들기 위하여 아들을 명문 에르푸르트 대학에 보냈다. 거기서 인문주의 학자 베셀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어거스틴파 수도원으로 수도사로 들어감으로 친구와 가족을 놀라게 했다.  그 동안 출세를 기대했던 아버지의 실망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런 급격한 생의 방향 전환은 비오는 어느 날 친구와 비를 피하려 나무 밑에 있다가 낙뇌로 친구가 죽은 것을 보고 종교적 고민을 하게 된데서 생겨졌다. 

    1507년 그런 참사를 겪고 보름 동안 고민 끝에 스차우핏츠 감독이 원장으로 있는 수도원에 들어간 것이다.   거기서 원장의 신임을 입어 교육을 받은 후에 1507년에 신부 안수를 받았다. 거기서 성경 연구의 기회를 얻었고 또 어거스틴 연구를 통하여 은혜의 교리에 접했다.  어거스틴 신학에서 은총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고 스타우핏츠의 권면에서 힘을 얻었으며 성경 연구에서 새로운 진리를 깨달았다. 벼락을 때리는 무서운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으로 보여지기 시작했다.  

    수도원에서 기도와 금식과 고행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풀 수 있을 줄로 알았던 루터는 점차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얻는 새 진리를 발견한 것이다.  용서받은 죄인으로 변화되는 신비로운 변화의 축복을 타울러의 글을 읽는 중에 더욱 동감하게 되었다.  이 확신은 로마서 강의 중에 더욱 굳혀졌다.   그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베드로 성당 완공을 위해 막대한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해 속죄권 판매를 강권하고 있었다.  판매의 촉진을 위해 판매 수입의 반액을 지방 감독이 차지하고 판매 책임자가 판매량에 따라 보상을 받고 나머지는 교황청으로 보내게 했다.  마인즈의 감독 알브레흐트의 파송을 받은 판매 책임자 도미닉 교단 수도사 텟젤은 당대에 웅변가요 학자로 유명하였다.  가는 곳 마다 그는 속죄 권을 사면 ‘사는 사람은 즉시 죄를 용서받을 것이요 연옥에 있는 자를 위해 사면 그 은화가 헌금함 속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순간 곧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외쳤다.

    루터는 뎃젤 일행의 도전을 묵과할 수 없었다. 그는 텟젤의 입성을 금하고 속죄권 판매에 대한 ·반대 설교를 하였다. 그리고 대학 교회 게시판으로 사용되는 성문 문짝에다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게시하였다. 이 사실이 독일 전역에 곧 펴졌고 얼마 후에 북유럽 전역에 널리 퍼져 속죄권 판매 실적이 급격히 떨어졌다.  95개 조항의 항의문의 골자-속죄 권을 죄를 속할 수 없다. 속죄 권은 죄의 벌을 면케 할 수 없다. 연옥에 있는 영혼을 구할 수 없다. 회개한 자는 이미 죄 용서함을 받았다-이다.

    이 새로운 진리에 접한 빗텐베르그 성민 들은 앞을 다투어 베껴 독일에 있는 친구 친척들에 돌려주었다.   당황한 교황은 다음해 7월에 루터를 소환했다.   1519년 드디어 격돌의 날이 왔다. 라이프지히에서 카톨릭의 학자 엨크와 루터 및 루터의 동료 칼쉬탈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이때 엑크는 루터를 이단으로 단정하고 말았다. 이 역사적 토론 후 루터는 자기 입장을 폭넓게 밝힐 필요성을 느끼고 1520에 세 개의 중요한 신학적 논문을 섰다.  이 책에서 교황의 월권 성직자의 독신주의, 교회의 사치 등을 비난하고 신학 교육의 개혁을 주장했다.   예상대로 1920년 루터를 파문하는 파문 장이 발행됐고 12월에 교황의 사절들에 의하여 벳턴베르그에 도착했다. 기다린 듯이 루터는 12월 10일 대학생과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주저 없이 파문장과 교회 법전을 불태워 버렸다.

    교황청은 2차의 파문장을 보낸 뒤 독일 국회에 압력을 가해 루터를 속히 정죄 하여 처형하기를 독촉했다.  그때 독일은 신성로마제국의 지배하에서 있었다.  1521년 황제는 4월 17일 보름스회에 출두 명령을 내렸다.  친구들은 가는 것을 만류했으나 루터는 가기를 결심하고 국회에서 말하기를 “ 나는 굳게 여기 섰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실 것입니다.”고 하였다.  황제의 정죄 선언 후에 회의는 끝났다.

    루터는 귀로에 프레드릭공의 배려로 발트부르크에 안내되어 은신했다.  그 성에 머물던 약 일년 동안 신약 성경을 헬라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하여 종교개혁의 기초 작업을 하였다. 1522년에 빗텐버르그로 돌아온 루터는 이제부터 본격적인 개혁 운동에 착수하였다.   그는 동료 멜랑통과 암스돌프등과 개혁 운동에 관한 전략을 협의하고 강단에서 말씀 선포를 통한 점진적인 개혁 운동을 전개할 것을 다짐했다. 

    찰스 황제가 교황과의 사이가 나빠지면서 국회는 종교개혁을 관용하는 법력을 내려 영주의 선택에 따라 신교와 구교를 따를 수 있게 하였다. 영주의 신앙에 따른 신앙 자유의 원칙은 1555년 아우그스부르그 평화 회의에도 채택되었다.  이로 인해 개혁 운동이 호전되자 1529년에 모인 국회에서는 관용령에 의해 1526년에 루터파 신앙이 관용된 지역 이외의 개혁 운동은 허락할 수 없음을 결정했다.  이 결정에 반대하여  항의하는 무리를 카톨릭 교회에서 항의자「Protestants」로 부르면서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이 생겨지게 된 것이다.

    이 무렵 신교도간의 성례 관에 관한 이견 조정을 위해 헷세의 필립공에 의하여 1529년에 말부르그에서 루터 파와 스위스의 개혁파 신학자들의 회의가 열리었다.  15개 조항의 토의에서 14개 조항까지는 합의 했으나 15번째 조항 곧 성찬의 그리스도 임재관에 대한 견해 조장에 실패했다.  루터는 공재설을 주장하고 쯔빙글리는 상징설을 고수함으로 회의는 결렬됐다.

    루터는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 한 카톨릭의 의식을 버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 개혁파에서는 성경이 명하지 않는 카톨릭의 모든 잔재는 다 버려야 함을 주장했다.

    또한 루터는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 있어서 국가의 간섭과 보호를 교회가 받아야 함을 주장했다.  교회의 행정권은 국가에게 맡겨 영주나 지방 도시의 시의회에서 교회  행정을 위한 위원회를 조직하여 그들이 교회를 운영케 했다.  국가는 종교 세를 징수하여 교회를 재정적으로 돕고 행정적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독일 루터파적 국교 주의는 교권과 속권을 혼동시켜 교회로 하여금 영적으로 약화시킨 원인이 되게 했다.  이로 인해 재침례파의 반발를 불러 일으켰고 훗날 경건파 운동을 낳게 하기도 했다.


         3. 칼뱅의 개혁


    루터에 의하여 시작된 종교개혁은 칼뱅에 의하여 다듬어지고 사상적으로 체계화되었다. 루터보다 칼뱅이 한시대 늦게 태어난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루터의 아버지가 루터의 성직투신를 극력 반대한 것과 대조적으로 칼뱅의 아버지는 칼뱅을 신부로 만들기를 원하여 파리 대학으로 보냈다.  그러나 섬기던 상사인 감독과의 충동 사건 이후 칼뱅을 신부로 보다 법률가로 교육시키기를 결심하여 오르레앙 대학으로 전학시켰다.   1531년에 아버지가 별세하자 칼뱅은 다시 파리로 돌아가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전공하였다.  이때 세네카의 관용론의 주해를 출판하여 그의 실력을 나타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칼뱅이 종교개혁 정신을 암시하지는 않았다.  그가 언제 어떤 계기로 카톨릭에서 신교로 개심하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1533년 11월 1일 친구 니콜라스 콥이 파리 대학의 학장 취임을 하게 될 때 취임 연설문을 칼뱅에게 의뢰했다.  칼뱅은 이 연설문에서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말을 인용하여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복음주의 사상을 소개하였다.  칼뱅은 콥의 입을 통해 개혁 사상을 선포한 후 대가를 받고야 말았다.  연설문의 초안 자임이 밝혀진 후 칼뱅은 신변의 안전을 위해 파리를 피하여 고향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종교적 평화를 교한시킨다를 죄목으로 얼마 동안 투옥되었다.  석방되자 미사를 반박하는 글을 쓴 뒤 1533년초 멀리 신교의 도시 바젤을 향한 망명길을 떠났다.  바젤에 머물면서 칼빈은 기독교 강요의 저술을 서둘렀다.  라틴어로 첫 판이 1536년 3월에 출판되었다.   서문에서 프랜시스 1세에게 드리는 글을 써서 개혁 주의 운동의 목적을 밝혀 순교한 친구의 입장을 설명하였다.  개혁 주의 신앙의 변증을 위한 교리서이기도 하다.  칼뱅은 일생동안 이 책을 손질하여 기독교 문헌에 있어서 불후의  거작을 만들었다.  그러나 1559년 증보판이 나오기까지 초판에서 밝혀진 기본 사상의 변화는 찾아 볼 수 없다.  이 기독교 강요가 다룬 주제는 신학 전반에 이른다.  그 포괄성은 어떤 신학 사전에도 뒤질 수 없으며 그 성서 인용의 정확성은 어떤 성서 신학의 추종을 불허한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 이후 칼뱅의 기독교 강요만큼 후대에 심원한 영향과 영속적인 감화를 준책은 없을 것이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를 출판한 후 1536년 봄에 이태리 여행길을 서둘렀다.  이태리에서 복음주의에 동조하는 페라라 공비 루네를 만나 개혁 운동의 지원을 약속 받고 비밀리에 고향을 방문하여 제네바를 들렸다.  제네바는 하룻 밤만 묵어 갈 예정이었으나 제네바의 개혁자 파렐이 찾아와 칼뱅이 제네바에 머물러 종교개혁을 계승하여 주기를 간청하였다.

    이렇게 하여 27세의 칼뱅은 자기보다 20세나 연장자인 선배 파렐의 권유를 받아 들여 제네바 개혁 운동의 전열에 참여하게 되었다. 당시의 제네바 시의 사정은 복잡하였다.  1521년경부터 루터의 제네바에  소개되면서 개혁의 싹이 트고 있었다.  1532년 여름 제네바에 속죄권 판매가 시행되자 시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갔다.   1535년 8월에 시의회는 드디어 프로테스탄트 진영으로 제네바 시를 이끌어 가도록 가결하고 미사를 금하였다.  이제 제네바는 개혁의 주인공을 기다리는 순간이었다.  준비된 무대 위에 칼뱅은 올라서게 된 것이다.  그 무렵 칼뱅은 정식으로 제네바 시의 목사로 시의회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칼뱅의 급격한 개혁 운동은 적지 않은 역반응을 이르켜 1538년 4월 시의회는 칼뱅과 파렐의 추방을 결의하고야 말았다.   이로 인하여 칼뱅은 불란서의 피난민이 많이 있는 스크라스벍으로 갔다. 칼뱅은 거기서 불란서 피난민 교회 목회를 하면서 저술에 힘썼다.  젊은 칼뱅에게 연구와 개혁운동의 지도자들과의 교제가 필요한 때였다. 여기서 그는 두가 지을 다 얻은 셈이다.  당시 스트라스 벍의 개혁자 부서와 카피토를 사귀며 그들과 함께 레겐스벍회의를 비롯 여러 국제회의에 참석하여 여러 개혁 운동 지도자들과 친밀하게 교제를 넓힐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그 동안에 제네바에서는 칼뱅을 추방한 파가 실권하고 온건파가 승리하여 칼뱅의 제네바 귀환을 요청하였다.  이제 그는 제네바의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 위에 바로서는 교회를 바로 세우기를 결심하였다.  그런 이상을 실천하는 첫 단계로 그는 교회 헌법을 기초하여 200인 의회의 결의를 얻어 공포하였다.  이 법은 사도 시대를 본받아 감독이 없으면 국가의 간섭을 배제하였다.  교회의 직분은 목사, 교사, 장로, 집사로 된 네 종류였다.

    다음으로 교리 문 답서를 작성하여 교인들을 교리적으로 훈련시켰다.  칼뱅은 성경의 생활 원리가  전 시민들의 것으로 받아 들여지는 영적 이상향에 이르도록 힘을 다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엉정주의적인 지도 노선은 적지 않은 반대를 겪어야만 했다.  그 논쟁의 대표적인 것들은 카스텔레오, 볼섹, 셀베티스등과의 충돌이다.  이들 중에 칼뱅에 가장 결정적인 타격을 준 충돌은 셀베터스 사건이었다.  그는 혈액순환을 발견한 의학자요 22세에 문제작인 ‘삼위일체론의 오류’를 쓴 학자였다. 이 책 때문에 셀베스터는 체포령이 내렸다.  그는 프랑스에서 체포되어 카톨릭 교회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리용 감옥에 수감중 탈옥하여 제네바로 도망 왔다. 칼뱅은 그의 개심과 신학 입장의 수정을 요구하였으나 그는 도리어 칼뱅을 추방하려고 칼뱅의 반대파를 종용하려 들었다.  칼뱅은 셀베스터에 관하여 파렐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그에게 적어도 사형 언도가 내려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혹한 방법으로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시의회도 이 재판을 오랫동안 끌면서 셀베터스의 회심을 기다렸으나 별 효과가 없자 스위스의 다른 도시 교회들에게 편지하여 의견을 물었다. 이에 대한 회답들은 예외 없이 이단자를 화형에 처하라는 것이었다.   드디어 1553년 10월 27일 셀베테스는 칼뱅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화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이 일로 칼뱅의 입장은 난처하게 되었다.  비단 셀베터스 사건뿐이 아니었다.  그밖에   수 많은 처형이 개혁의 수단으로 용납된 것은 제네바의 영광보다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그는 목회와 저서와 교정과 교수 일로 너무 몸을 돌보지 않고 지나치게 헌신했다.  그래서 그의 나이 보다 훨씬 늙게 보였고 몸에는 질환이 떠나질 않았다.  그런 체질을 가지고도 그는 제네바의 개혁 운동을 지도하였다.  그의 설교는 듣는 이에게 감화를 가져왔고 그 감화의 여파는 제제바 뿐 아니라 “전 스위스, 불란서, 영국, 스콧크란드에까지 미쳤다. 그의 말은 거의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임했고, 설교의 속삭임은 나팔의 권위를 나타내었다”.  1559년 아카데미가 개교된 이래 5년간 1,3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칼뱅의 강의를 들으려고 불란서, 독일, 헝가리, 이태리, 폴란드, 스페인 등지에서 몰려들었다.  그들은 칼뱅의 강의 노트와 제네바의 개혁 결실을 가지고 모국으로 귀국하여 개혁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로 스콧트란드의 낙서를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칼뱅은 유럽의 개혁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4. 재세례파


    재세례파를 가르켜 샤프는 “과격한 복음 주의자들”이며 “극단적인 프로테스탄트”라 부른다.  개혁파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을 재 개혁하는 뜻에서 개혁 교리를 강조하여 개혁파라 불리듯 재 세례파는 카톨릭과 루터파 및 개혁파들의 유아 세례를 반대하고 성인 세례만을 인정하여 재 세례를 주장함으로 재 세례파라 불리운다.  개혁자들이 성경에 의하여 카톨릭을 개혁시켜 초대 교회로 돌아가려는 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으로부터 얻은 진리로 새로운 교회 건설을 시도한다. 이 운동은 쮜리히시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그레벨과 만츠와 훕마이엘을 손꼽을 수 있다.  1525년에 즈빙글리는 그들과 공개 토론을 한 끝에 그들의 주장이 잘못됨을 지적하고 시정부로하여 유아 세례령을 내리게 하고 재 세례를 받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을 경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명령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으로 알고 행동으로 맞섰다.   만즈는 반 재 세례령이 내린 직후에 다시 세례를 받음으로 인해 체포되어 다음에 3월에 익살형으로 순교하였다. 

    훕마이엘는 1523년 부활절 직후 뢰우블리 목사에게 재 세례를 받고 재 세례의 정당성을 글로 변증하였다.  끝내는 모라비아로 추방을 당하여 재 세례파 운동을 거기서 전개하여 많은 추종자들을 얻었다.

    그들은 아우구스베르그에서 1527년에 지도자 회의를 열고 사틀러가 기초한 7개조의 신앙 선언 초안을 통과했다.  “우리는 신자 세례를 믿는다. 교회는 성만찬으로 결합된 모임이다. 성경은 축자 영감으로 받을 것이다.  권징은 파문이상 다른 처형을 내릴 수 없다. 교역자는 개교회가 선택하여야 한다. 신자의 정치 참여는 있을 수 없다. 신자는 맹세할 수 없다.”  이들의 주장은 신 구교 양교회에서 다 배척을 받았다.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주장을 피로써 확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1529년에는 스파이엘 국회에서 모든 재 세례파의 사형령을 가결하였다.


         5. 카톨릭의 반 개혁 운동


    프로테스탄트의 개혁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카톨릭 교회 안에서 자체 개혁의 운동이 싹트기 시작했다.  스레인에는 키메네스 추기경의 영향 아래 수도원의 개혁과 성직자들의 회개 운동이 일어났고 알카라대학을 설립하여 의학, 인문학, 고전 언어 등을 가르쳐 1522년에는 원어 성경을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이태리에서도 개혁 운동은 여기 저기서 일어났다.

    로마에서 1517년에 50여명의 평신도와 성직자들이 모여 ‘하나님의 사랑의 모임’을 조직하여 교회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교황 바울 3세에게 교회 개혁의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1」 예수회 운동-예수회는 익나티우스 로욜라에 의하여 1540년 파리에서 설립됐다.  로욜라는 영적 훈련이라는 책을 써서 고행 적인 경건 생활을 강조하며 수도원의 그늘을 즐기다 설혼살이 되던 해 성지를 순례하고 돌아온 후 수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35세의 고령으로 파리 대학에 입학했다.  여기서 그는 사비에르 례페브르등 경건한 친구들과 사귀었다.  1540년에 동지들과 군대 조직을 모방하여 ‘예수회’를 조직하고 로욜라가 최고 사령과에 취임하여 1556년 7월 31일 죽을 때 까지 재직하였다. 이들은 군대 조직적 체계와 규율을 가지고 엄격한 서약을 필수로 했다.  상관에 대한 절대 복종과 가난한 삶과 독신생활 등을 서약케 하였다.  이들은 교육과 선교에 힘썼다.  신교가 카톨릭의 개혁의 주력하는 동안 이들은 멀리 복음이 미치지 못한 대륙을 향하여 선교의 행진을 계속했다.


    2」트랜트회의 -이 회의는 독일 황제 찰스 5세의 의하여 제의되고 교황 바울 3세의 의하여 소집되었다. 황제는 트랜트회의를 통하여 신 구교가 다같이 공명할 수 있는 교리적 통일을 이루어 거기에서 오는 서구 기독교의 연합된 힘을 가지고 회교권 터키의 세력을 대항하려는 정치적 동기가 있었다. 반면에 교황은 카톨릭 적인 교리 확정을 얻어 이단 박멸을 위한 종교 재판의 수단으로 사용하려 하였다.  회의 결과는 교황의 정치에 황제가 말려들고 말았다.  18년간에 걸친 세차례의 회의 기간 5명의 교황이 경질되었고 참가 회원은 225명이었다.  회의 결정은 국가별로 투표하지 않고 감독 단위로 하게 하였기 때문에 다수의 감독을 가진 이태리 파의 승리로 돌아가고 말았다.   회의는 교리 확정을 먼저 하자는 교황파와 교회 개혁안을 먼저 다루자는 황제파의 대결로 난관에 봉착했으나 결국 교리안과 개혁안을 번갈아 토의하기로 하고 모든 결정은 교황의 최후재가를 받기로 하여 교황 지상권을 인정하여 교황의 원하는 대로 귀결되고 말았다.  그래서 결정된 교리는 카톨릭의 교리를 재확인하고 신교 교리와 반대되는 것이 되었다. 

    성경과 전통은 동등한 권위를 갖는다.  성경 해석 권은 교회에게만 있다.  원죄는 세례로 사함을 얻는다.  성례는 7가지이며 이 은혜의 방편을 잘 이용함으로 자법죄를 용서 받을 수 있다.  구원은 믿음과 행위를 통하여 얻는다. 제사장은 신부들 만이며 미사는 희생의 제사이다.   이러한 교리적 확정 이외에 트랜트 회의는 성직자의 자질 향상 독신생활 엄수를 강조하는 결정을 하고 신교의 사상을 배척하기 위해 금서 목록을 작성하기로 했다.


    3」종교재판-중세에 유행한 종교재판이 16세기에 신교 박멸의 수단으로 부활된 것이다. 고문으로 강요된 고백이 읽어진 후 정죄 되면 세속 정권에 의하여 형이 집행되었다.  재산 몰수, 투옥, 유배 및 사형 등의 형이 내려졌다.

    바울 4세는 6명의 추기경을 종교재판의 대법관으로 임명하고 전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탄압의 기수로 삼았다.  그들은 교회의 순결을 구실 삼아 이단의 엄벌을 정당화 시키려 했다.  1542년에 이태리에서 처음으로 시행된 종교재판의 형틀에 수 없는 개혁자들이 처형됐다.


         6. 개혁운동의 확장


    종교개혁은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낳고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세 가지 고백적 교회 즉, 루터파교회 개혁파 교회 및 영국 교회를 낳았다.   중세의 전체주의 체재는 종교개혁 이후 개인주의적 경향으로 기울어지면서 다양성 속의 단일성의 현상을 빚었다.  종교개혁이 단일 교회일 이루지 못하고 세 가지의 고백적 교회를 낳은 것은 결단코 불행한 것으로 마나 받아질 수 없다. 중세의 집단주의 및 획일주의에서 새로운 개인주의 및 다양주의 시대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신교 교회의 형성이 보인 다양성을 필연적인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의 원리는 같다 할 지라도 그 원리의 수용지의 형편에 따라 신교의 고백적 및 제도적 표현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게 되었다.  루터파는 주로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지방에 확산되었고 교리적으로는 기독론과 이신득의 사상을 강조하였다. 

    개혁파는 스위스와 화란과 스콧틀란드에 널리 확장되었으며 교리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 교리를 강조하며 복음의 사회적 적용을 중시하였다.

    영국 교회는 영국의 특수한 정치적 상황과 밀착되어 프로테스탄트 교리롸 카톨릭의 의식을 융합시켜 신학적으로 중용을 택하고 제도적으로 국교 형식을 따랐다.


    1」 프랑스-유그노로 알려진 프랑스의 신교도들은 박해 중에서 번성하여 갔다.   성서 인문주의들이 성경을 프랑스 말로 번역하여 공급하며 칼뱅의 사상이 점차 지성인들 사이에 침투하여 갔다. 스페인과의 오랬동안의 전쟁 틈으로 신교의 포교가 쉬었고, 헨리 2세의 융화 정책으로 유그노의 교세는 급진하여 헨리 2세가 죽을 무렵 1559년엔 40만을 넘었다. 그러나 헨리가 죽은 뒤 형세는 달라졌다.  성 바돌로매 날에 일어난 유그노 학살 사건이 불행한 그 시대의 단면을 보여준다.


    2」화란-화란은 루터 당시부터 종교개혁의 센터가 되어 있었다.  ‘공동생활의 형제단’의 근거지요 인문주의자 에라스므스의 활동 근거지였다.  안트벨프시는 파리 다음가는 유럽의 출판 도시로 많은 종교개혁 서적을 출판하였다.  1518년에 루터의 저서들이 화란 어로 번역되었고 1523년에 신약 성경이 화란어로 번역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종교개혁이 독일에서 한창일 무렵 스페인의 지배 아래서 박해가 계속됐으며 찰스 5세 치하엔 많은 순교자를  내었다.  필립2세 역시 종교재판을 통하여 지나치게 박해하자, 1556년엔 신교 지도자들이 모여 동맹을 하고 구교 탄압에 반격을 가하였다.  많은 성당이 파괴되고 혼란이 계속되지 1567년에 필립은 알바 장군이 이끄는 군대를 동원하여 무자비한 보복을 가했다.   오랜지 공은 화란의 애국 청년들은 모아 대항했으나 육전에 실패하고 해전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1576년부터 엘리자벹 여왕의 도움을 받아 알바 장군과 싸우다 1584년에 암살을 당하고 말았다.

    화란인 들은 꾸준히 스페인과 싸움을 계속하다 1609년에 드디어 스페인 군대를 화란에서 추방하고 1648년 웨스트 팔리어 조약에 의하여 독립을 쟁취하였다.  원래 개혁파는 화란의 북부 지역에만 환영을 받았으나 이후로는 개혁 교회를 정식 국교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1571년엔 라이덴 대학을 설립하여 신학을 주축으로 하는 종합대학으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1577년엔 오랫동안 박해를 받아 온 재 세레파에 종교 자유를 허락하였으나 교리적 관용은 알미너스주의의 대두로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다.   1621년 11월에 모인 돌트회의는 알미너스사상을 정죄하고 칼뱅주의 5대교리로 개혁 교회의 기초를 삼았다.


    3」스콧틀란드-스콧틀란드의 종교개혁은 정치적 배경을 떠나서 설명할 수 없다. 독립심이 강한 스콧트란드인들은 영국의 지배를 꺼려 프랑스와 친하려 하였다. 대륙과 친근한 동안 대륙의 종교개혁 사상이 쉽게 수입되어 16세기 초엽에 가장 탁월한 스콧틀란드 교회의 개혁을 부채질하였다.

    스콧틀란드의 종교개혁의 선구자는 해밀톤이었다. 빗텐베르그에 가서 루터의 감화를 받고 말부르그에서 연구한 후 귀국하여 개혁 사상을 외치며 설교하다 1528년에 화형 되었다.  그 뒤를 이어 녹스의 스승 윗샤르트가 화형을 당하였다.  박해의 원흉 비튼이 암살되자 이 때를 기다린 낙스는 샌 앤드류를 근거지로 힘찬 개혁 운동을 전개하여 스콧틀란드 종교개혁의 대업을 이룩했다.   그는 1547년에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19개월 동안 노예 생활을 하다 1549년 봄에 영국 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어서 궁중에까지 초빙되어 궁정 목사로서 일하게 되는 영광을 얻었다. 

    1554년 메리 여왕의 박해를 피하여 대륙으로 피신했다.  처음 푸랑크프르트에 들려 제네바로 가서 칼뱅의 제자가 되었다.  1556년에 다시 귀국하여 결혼한 후 수개월간 개혁 활동을 하였다. 아직 개혁 운동의 시기가 상조함을 깨달은 그는 제네바로 돌아왔다.  1557년 본국의 귀족들은 칼뱅에게 편지를 보내어 녹스의 귀국을 호소했다.  1559년 녹스는 귀국하여 다시 개혁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의 귀국 기도는 유명하다. 

    녹스는 이제 명실공히 스콧틀랜드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국회의 요청에 의하여 녹스는 5인의 도움을 얻어 신앙고백을 기초하여 통과시켰다.   1561년 1월에 ‘교회 정치’가 채택되어 장로교 회의 조직을 법제화하였다.  칼뱅에 의하여 제네바에서 적용된 교회 행정이 이제 스콧틀란드 전국에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 진전을 멀리서 본 칼뱅은 축하와 격려의 편지를 보냈다.


    4」영국의 종교개혁- 영국의 종교개혁은 교리적 개혁보다 정치적 동기에서 발단되어 점차 국민들에게 하향식으로 영합되어진 점에서 대륙의 종교개혁과 성격이 다르다.  헨리 8세의 결혼 문제가 영국의 종교개혁의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특이한 면을 엿볼 수 있다.  스페인과 제휴의 필요성에 따라 6세의 연상인 카터린과 결혼을 강요당한 헨리 8세는 15년간 결혼생활중 남아를 상속자로 얻지 못하자 형수와 결혼 탓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 끝에 궁녀 안볼린을 사귄 뒤에 황후의 조건을 내세우는 볼린의 압력에 굴복하여 대주교 윌세이를 통해 카터린과의 이혼 허가를 교황에게 교섭했다.  교황은 영국 보다 스페인을  더 중시하여 이혼 허가를 거절하였다.

    이런 교황과의 마찰을 종교개혁의 호기로 깨달은 크랜머는 이 문제를 지성의 심판을 받기 위해 궁정 목사로 발탁되었고 대학 사회의 반응은 호의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1533년 1월 25일 헨리 8세는 비밀리에 이미 임신 중인 안볼린과 결혼하고 말았다.  다음에 교황은 헨리를 파문함으로 맞섰다.  1534년 의회은 국왕 지상권을 가결하여 교황과의 완전 결별의 법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이제 헨리는 영국 교회의 머리가 된 셈이다.  여기에 반기를 든 캠브리지 대학교 총장 핏셔와 모어 경은 처형되었다.  헨리는 1536년에 대역령을 내려 무자비하게 카톨릭을 탄압하고 수도원을 폐쇄하여 국고 수입을 올리고 카타린처럼 볼린을 간음죄를 뒤집어 씌어 처형하였다. 

    볼린을 처형한 후 10일만에 세이모어와 세 번째 결혼을 하는 불법을 자행하였다.  헨리를 이어 에드워드가 10세로 즉위하였다.  그는 세이모어의 소생으로 신교 지도자들의 자문을 받으며 6년간 다스리다 요절했다.  교회의 예배 의식이 바뀌고 예배는 라틴어 대신 영어로 거행되었다.  기도문이 출판되고 성직자들의 결혼이 허락되었다. 

    크랜머는 42개 신조를  채택하여 칼빈주의적 신학위에 영국 종교개혁의 기초를 놓았다.  42개 신조는 칼빈주의적 입장에서 나중에 루터교적인 39개 신조로 바뀌어 나오게 되자 왕의 서명은 받았으나 의회의 통과는 보지 못했다.   크랜머는 대륙의 개혁 지도자 부서를 초빙하여 개혁 신학을 소개하는데 힘썼다.  에드워드는 카톨릭의 반발이 일기 시작할 무렵 죽고 메리 여왕이 뒤를 이었다.  메리는 카톨릭인 카터린의 딸로서 37세에 즉위하여 어머니의 신앙을 따라 영국을 카톨릭으로 복귀하는 일에 힘썼다. 1554년 스페인의 황태자 빌립2세와 결혼하여 철저한 카톨릭 주의를 따랐다.   공동기도서를 폐지하고 신부의 독신재를 부활시키고 290명의 신교 지도자들을 처형시켰다.  이로 인해 ‘피에 젖은 메리’라는 별명을 받기에 이르렀다. 

    크렌머와 리드리와 라티머 같은 신교의 지도자들이 메리의 손에 순교 제단의 이슬로 사라졌다.   엘리자벹 여왕은 안볼린의 소생으로 크랜머의 지도 아래 신교를 배웠기 때문에 메리 여왕 시절 불안 속에 살다, 26세에 메리를 이어 즉위했다.  엘리자벹 여왕의 치하에 영국 교회는 국교 주의로 굳혀졌고, 예배통일령을 내려 철저한 단일화 작업에 손을 댔다. 여기에 반발하여 청교도 운동이 전개됐고 엘리자벹 여왕의 박해를 피하여, 청교도들은 새대륙 미국으로 이민 길에 앞을 다투어 나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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