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37 문안 받을 사람들 롬16:1-16. 21-23.
사람은 알아주는 것을 선호합니다. 학창 시절에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아마도 자신을 기억해주고, 알아주었던 선생님일 것입니다. 저의 경우도 되돌아보면 많은 선생님이 가르치셨지만 그래도 나의 기억 속에 지금도 생생히 살아 계신 선생님은 나를 알아주고, 나의 고통을 기억해주셨고, 나를 유난히도 사랑해주셨던 선생님을 잊지 못합니다. 이러한 경우는 긍정적으로 기억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기억되는 사람도 많지는 않지만 몇이 있습니다. 그 중에 어떠한 사람은 나의 기억 속에 부정적으로 각인 되어 있어 그 사람만 생각하면 웬지 안 좋은 생각이 나의 기억의 언저리에 머물곤 합니다.
어떠한 사람은 어렸을 때에 자기에게 상처 입힌 사람을 잊지 못하여 그 상처를 씻으려고 몸부림치다가 그만 그 사람을 가해하는 경우도 드문 일이지만 이따금씩 발생하곤 합니다. 얼마나 그 상처가 컸으면 그리하였겠습니까?
우리는 적어도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 긍정적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되어야지 부정적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동안 그의 기억 속에 긍정적으로 기억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바울 자신, 또는 바울과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헌신한 사람”들이 바울의 기억 속에 앨범과 같이 기록된 자들입니다. 이들을 바울 사도가 일일이 기억하고 그들에게 문안하라고 로마교인들에게 부탁합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사도바울이 자기의 복음사역의 완성을 위해서 로마교회에게 육신적인 도움을 청구한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바울은 자기만을 챙기지 아니하고 자기 주변에 헌신적인 동역자들과 교회에 도움을 주었던 인물들을 집적 챙기면서 문안 받을 사람들을 기록으로 남겨 놓는 것을 볼 때에 자기의 복음사역에 공로(5:19)를 자기만의 것으로 돌리지 아니하고 남들과 같이 그 기쁨을 나누는 바울의 지극히 인간적인 진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의 기억 속에 긍정적으로 남아 있는 인물들중 대표적인 사람 몇몇을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 번째 인물은 바울 자신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경우입니다.
브리스가(브리스길라)와 아굴라(3-4) 그리고 그의 친척 중에 안드로니고와 유니아(7), 헤로디온(11), 루포의 어머니(13), 또한 바울의 특별한 사랑과 관심을 끈 에베네도(5), 아블리아(8), 스다구(9), 버시(12)의 경우가 바울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는 인물들입니다.
그 중에 브리스가아 아굴라는 본문 3절에서 5절 초반절까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그들이 사도바울을 위하여 힘쓰고 애쓴 사실을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부각시키어 상세히 이야기합니다. 3절과 5절의 첫 번째 문장을 읽어보겠습니다.
“3.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쁜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5.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부부성도들입니다. 이들은 바울의 복음 사역에 동역자일뿐 아니라 동업자들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복음의 사역을 감당함에 필요한 재원을 주로 천막 만드는 일로 충당하곤 하였는데1), 바울 당시의 로마는 군사적인 원정이 잦았던 나라였습니다. 로마는 강력한 군사력에 의해 평화를 유지하였는데 그 표현을 pax Romana라고 합니다. 이는 지금의 미국이 군사적 패권으로 세계의 평화를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pax Americana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 표기가 바로 pax Romana를 인용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로마가 강력한 군사력으로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는 있어서 장막은 로마군인들이 다른 나라를 정복하거나 방어하고, 평화를 유지하는데 필수품이였습니다. 대개 8명이 한 텐트를 사용하였기에 텐트는 대제국을 유지했던 로마군에게 상당히 많이 필요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군수물자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고, 복음사역에 물질을 동원하였던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바울은 군수물자를 취급하여 어느 정도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던 사람이였습니다.
그러한 그와 업이 같은 사람들이 바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였는데, 그들이 고린도에서 만납니다. 처음에는 이들이 사업상의 거래로 만나2) 나중에는 피를 나눈 이상의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고린도에 오게된 동기는 로마의 황제 글라우디오(Cladius A.D. 41-54)3)가 로마에 사는 유대인들이 소동을 일으키자 글라우디오는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추방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들 부부가 고린도에 머물면서 바울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떠나자 같이 동고동락을 하였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있어서 특이한 것은 그들이 성경에 능한 자들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사역은 사도바울의 말씀사역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 번은 많은 학문이 있고 성경을 잘 아는 알렉산드리아 사람 아볼로가 에베소에 찾아와 회당에서 예수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나, 말씀의 중심-그리스도의 부활과 죽음, 성령강림-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하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그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아볼로4)는 말씀을 올바로 알게 되여 아가야 지방으로 건너가 그 지방 성도들에게 은혜로서 많은 유익을 주었다고 기록합니다(행18:24-28). 이와 같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성경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잘 양육하는 훌륭한 지성을 겸비한 바울의 동역자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단편적인 성경의 지식에 머문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가슴에 담고 하나님의 사역에 충성한 가슴이 뜨거운 성도들이였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자기들의 목을 내어놓고(4) 바울의 복음사역과 이방교회들의 부흥과 성장을 위해 헌신할 수 있었던 것5)입니다.
현대의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듣고. 깨닫고, 은혜도 잘 받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기도원으로, 작정기도로, 부흥회로 모임을 가져 주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습니다. 그 결과 청각이 고도로 발달하여 목회자들이 말씀을 잘 전하는지, 못 전하는지 즉시로 분별하고, 비판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같이 헌신되고, 주님의 사역에 동원되는 사람은 참으로 적습니다. 은혜 받는 자리에는 모두가 너나할것 없이 몰려드는데, 희생하고, 헌신하는 자리에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것이 현대교인들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우리교회의 문제입니다. 은혜를 받기만을 원하지 희생할 줄을 모르는 비정상적인 신앙생활이 문제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신앙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이러한 잘못된 신앙에서 한 단계 올라서야 됨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할 때 교회가 기억해주어 문안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성도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사람들로 그의 친척들이 자연스레 등장합니다. 그의 친척들은 안드로니고와 유니아(7), 헤로디온(11), 루포의 어머니(13)로서 이들은 바울과 아주 가까운 사이로 이들이 복음의 사역에 큰 역할을 감당해주었습니다.
이중에서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와 같은 경우는 사도바울이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그곳에 같이 갇혔던(전쟁에서 함께 포로된 자) 경력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감옥에 갇히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전혀 굽히지 아니하고 바울곁에서 같이 힘을 돋우어주었던 사람들6)입니다. 지금도 사람의 인권을 이야기할 정도로 감옥이나 경찰서의 유치장을 인권의 사각지대라고 하는데, 2000년 전의 로마제국주의의 인권은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였겠고, 추위와 목마름이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자리에서도 주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사람들이 초대교회의 성도7)들입니다.
남강 이승훈 선생님은 감옥이란 곳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감옥이란 곳이 참 이상하군 약한 사람은 더 약하게 만들고 강한 사람은 더 강하게 만든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믿음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이토록 헌신하고 봉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세상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상주 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히11:25-26 )8).
그리고 안드로니고와 유니아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을 정도로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일을 하였습니다.
교회 일을 하다보면 홀로 독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개 이러한 실수는 교회의 중직을 맡은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일입니다. 자기 딴에는 믿음의 경력이 있다고 운운합니다. 또한 기도의 은혜를 받은 경험과 성경지식이 많이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심지어 목사나 장로보다 신앙생활을 많이 하였다는 부류의 사람들이 자기의 생각과 독단으로 교회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심방을 한다든지, 전도나 기도회를 한다든지 자기 멋대로 상의 없이 교회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에 윗선을 무시하고 일을 스스로 만들어 자기 딴에 열심히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한 경우 교회의 질서가 심각하게 어지럽혀집니다.
이러한 문제로 목회자가 가끔씩 골머리를 앓는데 우리 성도들은 절대로 이러한 독주가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참 좋다고 생각하는 일들도 일단은 상의하고, 허락을 받은 이후에 일을 진행해야 합니다. 그리해야 하는 일에 교회로부터, 목회자로부터 격려를 받게 되고, 힘을 얻게되고, 추진력과 지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의 경우는 바울보다 먼저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었지만 바울을 측면에서 지원하고,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협력하는 수준에서 자기의 위치를 분명히 지켰습니다. 그러하였기에 사도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입니다.
또 사도바울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사람으로서 헤로디온과 루포의 어머니가 있는데 이 루포의 아버지가 바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억지로 진 사람으로서 그 부인을 사도바울이 무척이나 존경하였던 갔습니다. 루포의 어머니와 같이 우리 중 연세 많은 사람은 교회사역자들로 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9). 즉 자기의 나이에 책임을 지는 그러한 믿음을 소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의 관심을 독차지한 에베네도(5)가 있는데 이는 아시아에서 처음 익은 열매이였습니다. 복음을 증거 하였을 때 가장 먼저 복음을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복음에 열정을 가진 바울이 그러한 믿음의 열매를 얼마나 귀중하게 여겼겠습니까? 그리고 바울의 사랑을 입은 자들로는 암블리아(8), 스다구(9), 버시(12)가 있는데 이들이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버시의 경우에서 잘 나타나는데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울은 이러한 자들을 문안 받을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두 번째는 바울을 포함한 우리와 관련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뵈뵈(1-2), 바울의 동역자 우르바노(9)가 있는데 이중에 뵈뵈의 경우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사도바울로부터 로마교회에 특별히 추천을 받은 여성집사라고 보면 됩니다. 바울이 사역하던 당시에 대부분의 교회중역은 남성들이 많았는데, 사실 여성들의 권익이나, 입지가 상당히 약했던 시대에 자매 뵈뵈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봉사하였다고 하는 것은 그녀가 상당한 정도의 헌신-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1)-을 아끼지 않았던 때문이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뵈뵈를 로마교회에 천거하면서 당부하기를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주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로마교회가 뵈뵈를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뵈뵈는 그만한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자를 교회가 문안해주고,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아무일도 하지 않고 우리가 인정함을 받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세 번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는 로마교회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람을 말합니다. 이들 중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10)가 있습니다.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12)가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공인된 국가기관이나, 단체, 또는 회사의 중역으로부터 인정함을 받기 위해서 분주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심지어 독서실에서 밤잠을 못 이루며 하는 공부는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연예인을 꿈꾸는 사람들은 서울의 모 햄버거집 앞에서 서성이다가 연예가 종사자들로부터 픽업되기 위하여 서성인다고 합니다. 모두가 인정받고 싶기 때문입니다. 연예인들이 토크쇼할 때 관객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십시오. 연예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것입니다. 정치인들의 모임을 보십시오. 권력의 그늘에서 서성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론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사주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하여 사주가 잘못된 줄 엄연히 알면서도 그 주위를 떠나지 않고 검찰에 연행되는 자리에 자발적으로 나아가 언론을 핍박한다고, 부당한 대우를 한다고 외쳐댑니다. 모두가 인정받기 위해서 그럽니다.
우리 교회가 지금은 작지만 앞으로 커지면 그러한 사람이 없으라는 법도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벨레와 같이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인정받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인정함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앞에 헌신된 일군들이 인정해주는 그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만이 교회의 문안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문안 받을 사람이 입니까? 아닙니까? 아니라면 앞으로 문안 받을 사람이 되시겠습니까? 아니면 교회의 관심을 비켜 가는 사람이 되시렵니까? 우리는 사도바울이 문안하라고 한 목록의 성도들과 같이 주의 사역에 헌신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인정해주고 기억해주는 인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미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헌신하시지 않았습니까? 185장의 내용대로 “내 너를 위하여 몸버려 피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주느냐” 주님의 물음에 우리는 어떠한 자로 서겠습니까? 교회의 사역을 어느때까지 방치하시렵니까? 교회에 언제까지 손님으로 남겠습니까? 이제 주인이 되십시오. 교회 사역에 자발적으로 동참하여 교회로부터 잊혀지지 않는 그러한 성도가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하면 21절로부터 23절에 기록된 대로 문안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주님께서 우리의 진정한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우리가 헌신하면서 흘린 눈물과 땀방울을 친히 씻어주실 것입니다(계7:18)10).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교회로부터 문안 받을 수 있는 사람, 주님으로부터 문안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서야 합니다.
1) 행20:33-35.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You yourselves know that these hands of mine have supplied my own needs and the needs of my companions). 범사에 너희에게 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고전9:11-12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 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2) 행18:3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3) 네로(Nero, A.D. 54-68)의 어머니에 의해 독살당함
4) 고전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5) 계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6) 히11:36 또 어떤 이들은 회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7) 찬383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우리도 고난받으면 죽어도 영광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8) 딤후4:7-8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9) 잠16:31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 의로운 길에서 얻으리라.
10) 계7:13-17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찌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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