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13:11-13 / 11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13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주간이 되면 나름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을 생각하면서 금식하고, 기도하고, 또는 절제하는 아름다운 미덕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미덕을 발휘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잘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을 말하며, 고난이 우리에게 어떠한 삶을 요구하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전체 성경이 그러하듯이 안다는 것은 항상 행함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안다는 것은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 행함으로 옮겨질 때 온전한 앎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그리스도의 고난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보고, 그 앎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1) 그리스도의 고난은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십자가는 주전 1000년경 앗수르와 페르시아에서 사용했던 형벌입니다. 이러한 형벌의 문화가 서방으로 전수되어 헬라까지 사용되어 사형집행의 방법으로 쓰였습니다. 십자가형의 대상은 반역자나, 망명자, 강도질을 한 노예, 살인자등 흉악범들에게 선고되어졌다고 합니다. 피고의 범죄가 밝혀지면 사형수는 법정에서 끌려나와 옷을 벗기운 상태로 긴 끈으로 매질을 당하였는데 끈의 끝에는 쇠갈고리가 있어 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했다고 합니다(마20:17-19, 요19:1-3, 벧전2:24). 그 후에 십자가를 지고 죄수의 어깨에 메워서 행진을 시켰다고 합니다(마27:32). 그리고 사형장은 늘 성 밖에 있었다고 합니다(히13:12). 십자가에서 사형집행이 이루어지면 사형수는 두 세 시간 안에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십자가에서 호흡이 곤란해진 이후에 곧 바로 운명하게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3시간 이상 달리셨다 죽임을 당하셨습니다(마27:45-46).
그렇다면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들에게 어떠한 의미인지를 알아봅니다. 십자가는 화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엡2:14-18 /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위로는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합니다. 화목하게 한다는 말은 어떤 상태를 전혀 다른 상태로 바꾸어 놓는 것을 말합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써 하나님과 원수였으나 십자가의 은혜를 힘입고 이제 하나님과 화목한 상태, 은혜로운 상태, 즉 증오의 대상이 사랑의 대상으로 바뀌어져 있으니 이것이 곧 화목인 것입니다.
롬5:8-11 /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 하느니라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옆으로는 하나 되도록 합니다. 교회 내에는 각양각층의 사람들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서 유대 기독교인과 이방 기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상적으로 혈통적으로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정신이 올바로 나타나면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6(” 라고 기록한 대로 모든 인간 상호간의 갈등과 분열이 치유되어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교회는 물론 국가와 기업에서도 이질적인 둘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가진 자와 없는 자 사이의 계층분열이 치유되어져 유전유심(有錢有心) 무전무심(無錢無心)이 아니라 유신유심(有信有心), 무신유심(無信有心)심이 되어야 하고, 배운 자와 못 배운 자가 나란히 앉아 유학유심(有學有心) 무학무심(無學無心)이 아닌 유학유심(有學有心) 무학유심(無學有心)이 되어 전혀 어색함이 없이 영적인 교제를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몬1:6 바울과 오네시모). 또한 나이 많으신 어르신과 젊은이들이 한 대 어울려 앉아 박장대소하면서 웃고, 위로해 주고, 사랑이 오가야 십자가의 정신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민족적으로는 남한과 북한이 마주앉아 민족의 평안을 위해서 같이 앉아 머리를 맞대야 하고, 국가적으로는 야성이 강한 사람과 여성이 강한 사람들이 함께 앉아 난상토론을 하면서도 하나의 목표인 국가의 부흥을 논해야 하고, 기업에서는 발전을 도모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열어 줄 수 있는 믿음의 장입니다. 그러하기에 십자가는 우리 모든 정치, 사회, 문화, 경제 전 분야에 걸쳐 적용될 수 있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가 된 다는 것은 다양성을 부인하여 획일적인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양성 속에서 상호조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고전12: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2) 그리스도의 고난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벧전2:24 /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신 것입니다. 죽음이란 죄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롬6:10-11 /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2-1) 죄에 대하여 죽으면 직장생활에서도 유익을 줍니다.
벧전2:18-21 /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2:18에는 “사환들아”라고 부르면서 직장 생활하는 자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즈음과 같이 경기 불황이 장기화되고, 일자리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할 때에 본문은 금과옥조(金科玉條 금이나 옥처럼 귀중히 여기어 꼭 지켜야 하는 법칙이나 규정과 같은 말씀)같은 교훈 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에 우리 직장인들이 순종해야 될 영역을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할 것이 아니라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까다로운 자란 불공평하고, 무정한 자를 말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형평성을 잃어버린 상사는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으며, 무정하다 못해 냉정한 상사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순종하면 아름답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너무나 약자의 윤리를 강조하는 듯 하지만 실제적으로 이토록 인내하는 자세가 직장인들에게는 필요합니다. 모 대기업에서 실제적으로 있었던 일입니다. 평소에 직장동료 중에는 원망과 불평을 하며 조금만 아파도 결근하는 그러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회사가 어려워지자 많은 사람들을 퇴직시켜야 했는데 놀랍게도 이러한 사람들이 퇴직명단에 올라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부당하게 생각될 정도로 힘든 일이라 하더라도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참으로 이는 아름답다고 했습니다. 모두가 힘들다고 할 때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경제적인 한파를 능히 뛰어넘을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2-2) 죄에 대하여 죽으면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본문에 밀알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영생의 열매를 맺게 하신 것과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산다면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님과 영원토록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살전5:10-11 / 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시88:5 무덤에 누운 자, 단12:2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주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자들은 세상에 나아가서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겠고, 교회에서는 덕을 세우는 일에 협력해야 합니다. 본문에 덕을 세운다는 말씀은 교회를 세운다는 말씀이 되고, 사람을 세운다는 말씀이 됩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룻과 같이 믿음에 대하여서는 추호도 세상과 맞바꿀 수 없다는 굳고 굳는 신앙적인 용단이 필요합니다. 룻은 자기의 고향(세상)을 떠나 유대땅(교회)에 돌아와 보아스를 만나서 이스라엘 집을 세우는 일에 일조한 라헬과 레아 또는 다말과 같은 인물입니다. 그러함으로 그를 통하여 오실 그리스도가 준비되어 졌으며 그 과정에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룻에게 다음과 같은 복된 기원을 들려주었고, 또 그렇게 복을 받았습니다.
룻4:11-12 / 11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12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초기의 기독교가 교회를 온전히 세워나갈 수 있었던 것은 물질만능주의에 힘입은 결과가 아니라 오직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되어졌습니다. 처음교회는 말씀의 권위가 있었고, 성령의 역사가 충만했습니다. 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집중하였다는 뜻이 됩니다.
행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교회가 많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평안할 수 있었던 비결은 성령의 위로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초대교회가 사울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위로로 전도의 명령을 온전히 감당한 결과 바울이 전도사역자 되는 부메랑 효과를 힘입어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졌다고 하는 외면적인 성장을 이루어 갔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내면적인 성장은 사람을 세우는 것으로서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성도들에게 있었고, 그 성도들 앞에는 열정어린 사도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사도행전20:31-35의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3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3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본문에 “일깨어”라는 표현은 명령형입니다. 긴장하라는 말씀이요, 눈을 뜨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에 깨어 있으라는 말씀이요, 영적인 잠에서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깨어 있는 자의 특징은 기도에 힘쓰며 늘 감사의 조건을 발견하는 사람입니다(골4:2, 막14:38). 깨어 있는 자에게 말씀이 역사하는 것이지 깨어 있지 아니하고 사망의 잠(시13:3)을 자는 자들에게 말씀이 역사하지를 않습니다. 그러함으로 깨어 있어서 사도 바울이 삼 년 밤낮을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말씀이 듣는 자들로 하여금 영적인 진보를 허락하여 결국은 모든 가 가운데서 기업이 있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기업이란 구별된 자들에게 주어진 구원을 말하며, 하나님 나라를 말합니다(엡5:5, 갈3:29).
3)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도 그를 위하여 고난 받는 삶을 선택하라는 뜻입니다.
빌1:29 /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믿음이 설익은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고 평안한 삶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복을 달라고 기도하며, 또한 복된 삶도 살아갑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고, 또한 주님도 그러한 삶을 원하십니다. 마치 부모가 자녀의 부유함을 보고 기뻐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빌1:29에는 신앙의 깊은 경지에 오른 자들에게 증거 합니다. 그를 위하여 고난을 받게 하려고 믿음을 주셨고,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 위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신다고 성경은 기록하며,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13:13 에도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과 치욕이 있는 자들에게는 복이 있는 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복을 사모하면서 살아야 진정으로 성숙한 자요, 성숙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벧전4:12-14 /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결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요즘처럼 믿음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행함이 전무한 시대에, 세상마저도 기독교의 타락에 대하여 비판하고, 원성이 자자한 시대에, 오늘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 부패하지 않는 산 교훈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교훈이란 우리에게 선포되어진 것을 말합니다. 주어진 것을 말합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의미는 십자가로 하나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아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아서 사회생활에서 선을 행함으로 아름다운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와 함께 동행 하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생의 복을 받은 자들이 힘써야 할 것은 덕이 있는 신앙으로서 교회를 세우고, 신앙의 성장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아 어떠한 치욕이라도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감으로 진정으로 무르익은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딛2:6-8 / 6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신중하도록 권면하되 7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에 부패하지 아니함과 단정함과 8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교훈이 부패하지 않으면 세상의 영이 우리를 정죄할 수 없고, 세상의 음란한 세력이 우리를 잡아 삼킬 수 없습니다. 교회가 타락하고, 교회가 진실을 잃어버리는 것은 처음 사랑과 처음의 교훈을 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소시의 짝을 버렸다”이라고 잠2:17에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70인역 에서는 교훈으로 의역하여 기록함으로 다음과 같이 의역하고 있습니다. “소시의 교훈을 포기했다” 그 결과 음녀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로 볼 때에 교회나 성도는 결코 그리스도의 교훈을 저버리고서는 교회나 성도로 세워질 수 없을 뿐 더러 하나님 앞에 버림 받을 수 있다는 위기감 내지는 경외감에 사로잡혀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견인의 은혜가 발휘되는 것이지 자기암시적인 견인의 은혜는 은혜가 아닙니다. 교훈을 저버리면 행위도 저버리게 됨으로 스스로 팔려 음란한 죄를 짓는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아시고 오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말씀하신 성경의 구절들을 깊이 생각하여 우리의 삶으로서 주님께 신앙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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