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요5:10-18 예수님을 핍박한 사람들

아론33 2009. 3. 17. 20:08

  JOHN14  요5:10-18  예수를 핍박한 사람들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으로 38년된 병자는 그 고통과 슬픔과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얼마나 기쁜 일이며, 얼마나 환영할 일입니까?  또한 하나님 앞에 그 얼마나 영광이 되는 일이였겠습니까?  박수 갈채를 그 치료의 현장에,  그 회복의 현장에 보내어도 시원치 않을 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이적을 일으킨 날은 안식일이였습니다.  그 날에 참된 자유와 회복이 38년된 병자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안식일은 십계명 중에 제 4 계명으로 주어진 계명 중에 계명입니다.   이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엿새동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이레 되는 날에 쉬심으로 창조의 기념일로 제정하신 날입니다.  이 날에 하나님이 안식하셨고(창2:2),  이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습니다(창2:3).   여기에 거룩하다라는 말은 구약에 약 830회 나오는데, 이것은 불결한데서 빼내어 하나님께 순결하게 구별하여 바친다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이 날을 거룩하게 하심으로 사람에게 유익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모든 계명은 바로 이와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요, 사람에게 유익을 주려는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하라, 하지 말라는 말씀의 형태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은 친히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기에 우리 인생에게 가장 필요 적절한 항목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따라서 율법 중의 율법이라 할 수 있는 십계명은 하나님의 최소한의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 등장하는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병자가 치료되는 유익을 받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안식일의 참된 모습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안식일의 참된 의미는 도외시한 채 구약의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이 율법을 바로 지키는 것이라는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율법의 주인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계명 중의 사계명인 안식일 규례1)를 보면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과 관련된 내용이 구약의 다른 성경(느13:15, 렘17:19-23)에 보면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온다든지 어떠한 운반 행위를 하면 불경스러운 것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유대인들의 경전이라 할 수 있는 미쉬나2)을 보면 안식일에 금지된 일의 종류를 39가지나 기록해 놓고 있다고 합니다.  그 내용의 제일 마지막 규정은 물건을 한 곳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에 대한 금지 사항이 나오는데, 만약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살아있는 사람을 들것에 태워 운반한다면 그 사람은 그 들 것 때문에 비난을 받지 않지만, 들 것 위에 어떤 사람도 태우지 않은 채 그것이 운반될 경우 그 행위는 비난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의 해석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문을 접근해 보면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병자를 괴롭혀 왔던 자리에 연연하여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비방하는 것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습니다.   1절을 읽어봅시다.


  1.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ʾέλεγον ʾοΰν ʿοι ʾΙουδαιοι τω τεθεραπευμένω, Σάββατόν ʾεστιν, καί ʾουκ ʾέξεστίν σοι ʾαραι τόν κράβαττόν σου.


  유대인들이 구전된 율법에 의해 얼마나 잘 길들여지고, 왜곡된 율법의 해석이 그들의 삶을 얼마나 지배하여 왔는지 예루살렘에 있던 유대인들을 일제히 병 나은 사람을 집중하지 못하고 그들의 눈에 율법을 어기고 있는 불경한 모습-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불법이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율법의 본래 정신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매장된 율법의 잘못된 해석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은 그 현장을 보면서 자기 자신들을 돌아보고, 반성해야 했는데 그 좋은 기회를 놓치고, 주님의 용광로와 같은 사랑의 역사에 찬물을 끼얹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집단직인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까?  이들은 안식일을 지킨다는 미명하에 너무나 조심하고 조심한 나머지 안식일을 훼손하고 있는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지적이 얼마나 매서웠던지 38년된 병을 치료받았다는 기쁨을 가지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던 병자는 기쁨의 화색이 변하여 금방 걱정과 큰 죄를 지었다는 자책감에 사로잡혀 유대인들의 비난과 얼음장같은 목소리에 다음과 같이 답을 합니다.  11절을 읽어봅시다.


  11. 대답하되 나를 낮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 대.  ʿο δέ ʾαπεκρίθη ʾαυτοις,  ʿΟ ποιήσας με ʿυγιη ʾεκεινος μοι ʾειπεν ,ʾΑρον τόν κράβαττόν σου καί περιπάτει,


  38년된 병자의 목소리는 유대인들의 공격적이고, 도전적인 말에 일단 살아야 되겠다는 절박한 목소리로 자기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남이 시켜서 했다는 식의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랍비들의 법에 따르면 안식일에 고의로 공적인 장소에서 개인의 집으로 어떤 것을 옮기는 자는 참수형(목베임)을 당하든지 돌에 맞아 죽게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배경으로 생각하여 치료받은 병자가 답한 목소리는 모기소리와 같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가 아니었나 생각되어 집니다.  일단 유대인들의 서릿발같은 폭력적인 언사를 피해야 생명을 주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치료받은 병자만이 유대인들을 두려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일단 그 자리를 피하사 많은 인파가운데 몸을 숨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그 주님께서 안식일에 행하시는 일은 모두가 생명을 살리고, 회복시키시고, 지성을 일깨우시는 놀라운 일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핍박하고, 끝내는 십자가에 죽이는 어리석은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율법이 사람을 사람되게 하고,  사람에게 복이 되게 하여야 하는데,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율법의 해석은 너무나 거리가 먼 해석이요,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악법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무모하고 어리석은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지켜온 종교적인 덕목이 훼손된 원인을 제거하겠다는 생각으로 그 치료받은 병자에게 되묻습니다.  12절과 13절을 읽어봅시다.


  12.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피하셨음이라.   12. ʾηρώτησαν ʾαυτόν Τίς ʾεστιν ʾό ʾάνθρωπος ʿο ʾειπών σοι ʾΑρον καί περιπάτει;  13. ʿο δέ ʾιαθείς ʾουκ ʾήδει τίς ʾεστιν, ʿο γάρ ʾΙησοΰς ʾεξένευσεν ʾόχλου ʾόντος ʾεν τω τόπω.


  예루살렘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종교적, 율법적인 자기들의 아지트(agitation point)3)였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자기들의 생명같이 여겼던 율법의 외부조항이 치료받은 병자의 행위로 말미암아 훼손되어 자존심이 구겨진 이상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로 자기들의 본 거지인 예루살렘에서 그 율법을 어긴 불경건한 행위를 한 자를 찾아 일벌백계(一罰百戒)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병자에게 묻는 것입니다.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당장 말하라는 협박을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의 반성 없는 행위와  본말이 전도된 행위는 주님으로부터 거센 비난과 책망을 들어야 했습니다.


  마23:13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4)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리고 이들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한탄하셨고5), 안타까워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6).   주님은 이와 같이 행하시면서 많은 오류와 실수로 가득찬 유대인들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친히 성전에 올라가셨고, 가르치셨으나 그 가르침을 유대인들은 무위로 돌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며,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입니까?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하는 실수와 과실을 용서받을 수 있고, 넘어갈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실수나, 종교적인 죄책을 용서받기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그 실수나 죄책이 가져다주는 결과가 너무나 크고,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약3:1)7)

  따라서 유대인들은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자기들의 율법적인 해석이 얼마나 잘못되었고, 율법에 대한 이해가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서 멀어져 있는지를 수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는데,  자기들의 타락이 너무나 깊은 지라 진리의 빛으로 오신 주님을 이해하지도, 받아드리지도 못한 채 예수님을 핍박하게 된 것입니다(요1:4,5; 11).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입니까?  

  오늘 많은 기독교의 적이 내부에 있습니까?  외부에 있습니까?   다른 차원에서 묻는다면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하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기독교인에게 있습니까?  비기독교인에게 있습니까?  바로 기독교란 간판과 명분을 내걸고 있는 단체나 개인들이 기독교의 위상과 진실과 나아갈 길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많아지는데 사회는 변화되지 않고,  우리가 예수를 믿는데,  우리가 속한 가정과 일터가 변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기독교란 이름만 가지고 있을 뿐 그 안에 예수 정신이 망각 되여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정신은 의와 인과 신입니다(미6:8;마23:23).     제 나름대로 의와 인과 신을 정리해보면 의는 옳게 행하는 것입니다.  행함은 올바른 신념을 갖지 않은 상태로 행하면 오늘 예수님을 핍박한 유대인들과 같이 되어버립니다.  자기가 열심히 따르는 신념이 잘못되었을 때에는 역사적인 심판과 시대의 낙오자로 전락되고 맙니다.  그러나 올바른 신념을 바탕으로 행함을 갖는다면 그 행함은 옳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 올바른 신념을 가지기 위해 우리는 무단히 우리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지도를 받고 수정을 받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인은 자비를 말합니다.   자비는 주님을 알 때 실천 가능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향하여 일체의 자비를 베푸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죄인에게 어떻게 허락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에 근거합니다.   이러한 자비를 우리가 얻었기에 우리가 타인에게도 자비와 사랑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용서를 경험한 사람만이 용서를 베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정신은 또한 신 즉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세상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기에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다가 항상 그래왔듯이 세상이 우리를 배반할 때에 우리도 같이 배반을 당하여 미궁으로 빠져들고 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찌 보면 공즉시색이요 색즉시공이라고 한 불가의 경구가 이 세상을 잘 이해한 듯 합니다.   세상의 타종교도 세상에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치는데, 어찌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탐하겠습니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믿음입니다(약5:4).  

  이와 같이 기독교의 위상이 날로 떨어지는 이 시대에 기독교 본연의 정신을 붙들고 다시 무너진 장막을 우리가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그리하지 아니하고 손을 뒤로하고 뒷짐질하고 있다면 예수님을 핍박하던 유대인들과 오십보백보인 것입니다. 

  주님이 의와 인과 신을 저버리고 율법의 외형만 강조하던 유대인들을 피하셨던 것과 같이 우리들을 외면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잠시 피하셨다가 성전에서 치유된 병자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말씀하시며 그 말씀에 치유된 병자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14절과 15절을 읽어봅시다.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4. μετά ταΰτα ʿευρίσκει ʾαυτον ʿο ʾΙησοΰς ʾεν τω ʿιερω καί ʾειπεν ʾαυτω ʾΙδε ʿυγιής γέγονας μηκέτι ʿαμάρτανε ʿίνα μή χειρον σοί τι γένηται.  15. ʾαπηλθεν ʿο ʾάνθρωπος καί ʾανήγγειλεν τοις ʾΙουδαίος ʿότι ʾΙησοΰς ʾεστιν ʿο ποιήσας ʾαυτόν ʿυγιη.


  주님이 보실 때에 38년된 병자 보다 더 심하고, 악한 것을 죄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 죄는 오늘 본문을 근거로 하여 좀더 가까이서 관찰하여 생각하여 본다면 예수님을 배척하고 불신하는 죄일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의중을 이해하였기에 치료받은 병자가 유대인들에게 찾아가서  자기를 고치신 이는 예수라고 전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38년 동안 고통받아온 병에서 치료해주신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넘겨주려는 의도로 유대인들을 찾아갔다면 앞 뒤 문장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맨 처음 치료받은 병자의 심지가 곧지 못하고,  사려 깊지 못하여 예수님을 핍박하였던 유대인들에게 찾아가지 않았나 고민하였으나,  예수님을 배척하는 죄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전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에게 찾아갔다는 것이 본문을 이해함에 있어서 풍성한 감화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병자의 심지가 곧지 못하고, 사려 깊지 못하였다면 왜 구지 자리를 들고 가라고 한 이가 예수님이라 하지 않고, 자기를 고친 이가 예수님이라 하였겠습니까?    따라서 치료받은 병자는 예수님을 핍박하던 유대인들의 무모한 시도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과감하게 알리기 위하여 적진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선하신 사역을 소개합니다.  “나를 보십시오 주님이 안식일에 진정 하나님께 영광이 될 선한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나 또한 이렇게 고침을 받아 참으로 자유를 누리고 있는데 당신들이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신 주님을 배척한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라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어떻게 되어집니까?   이제 16절을 읽어봅시다.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지라.  καί διά τοΰτο ʾεδίωκον ʿοι ʾΙουδαιοι τόν ʾΙησοΰν ʿότι ταΰτα ʾεποίει ʾεν σαββάτω

 

  본래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안식일의 주인은 바로 주님입니다(막2:27-28)8).   즉 안식일이 그 주인이신 예수님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주인 되신 예수님께서 선하신 일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배척하고 핍박하였다는 것은 그들의 지성과 영성이 얼마나 메말라있었던가를 간접적으로 시사하며,  종교란 가면을 쓰고 사람을 옥죄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종교란 이름의 탈을 쓰고 많은 영혼들을 도적질하고,  억압하고,  사회의 기강을 흐트려놓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바로 알아야 하고, 바로 믿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무모함과 어리석음 앞에 주님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그리고 그 주님의 말씀에 유대인들은 얼마나 더 심하고, 악한 일을 일삼고 있습니까?  17절과 18절을 읽어봅시다. 


  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17. ʿο δέ ʾΙησους ʾαπεκρίνατο ʾαυτοις ʿΟ πατήρ μου ʿέως ʾάρτι ʾεργάζεται καγώ ʾεργάζομαι.  18. διά τοΰτο ʾοΰν μαλλον ʾεζήτουν ʾαυτόν ʿοι ʾΙουδαιοι ʾαποκτειναι ʿότι ʾου μόνον ʾέλυεν τό σάββατον ʾαλλά καί παπέρα ʾίδιον ʾέλεγεν τόν θεόν ʾίσον ʿεαυτόν ποιων τω θεω.


  하나님의 사역은 선하신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요셉과 같은 인물은 하나님은 악한 일도 선하게 일을 바꾸어 놓으시어(창50:20), 많은 생명을 구원하신다고 고백하였고,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하였습니다(롬8:28),  그리고 가장 구체적으로 우리가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사역은 만물의 결실기를 주심으로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행14:17). 심지어는 악인에게도 선을 베푸사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9).

  하나님의 이러한 사역과 같이 주님도 동일하게 일하신다고 하니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주님을 죽이려 한다고 기록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온 것이 아니요,  한 걸음 더 물러간 것이며,  이제 돌아올 수 없는 다리는 건너가고 만 것입니다.  

  오늘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인 주장과 신념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간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는데, 그만 그 기회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38년된 병자는 그 죄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 주님을 영접하고,  주님을 증거 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갔는데,  유대인들은 불행하게도 주님을 배척하고 핍박하며,  살인을 모의하는 어리석은 자리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오늘 유대인들의 비극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참으로 많은 교훈을 얻게 됩니다.  기독교의 정신은 간과된 채 외형만 화려해 가지고는 주님 앞에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화려한 예루살렘의 예배당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공언하였지만 정작 그 자리는 하나님을 저버리는 자리였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유산은 상당부분 주님의 말씀으로 다시 조명을 받고 제 자리로 돌아왔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과 행함을 통하여 수정을 받지 못하자 이방인과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있는 종교적 삶의 행태들을 낱낱이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조명하고 뒤돌아보아 주님을 핍박하고, 주님을 배척하는 자리에 서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잃어져가고 있는 예수정신을 살려 의와 인과 신을 가지고 주님 앞에 겸허히 엎드려야 하겠습니다.


1). 출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 일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2). הנשׁמ는 반복을 의미하는 הנשׁ(샤나)에서 파생된 말로 구전된 유대인들의 율법을 지칭.  미쉬나는 족장 랍비 유다(주후135년 출생)에 의해 편집된 구전 율법의 수집본, 미쉬나는 여섯부로 나뉜다.  1)제라임:농업에 관한 율법들, 2)모에드:안식일, 축일들, 금식일에 관한 율법들, 3)나쉼:결혼과 이혼에 관한 율법들, 4)네제킨:민법과 형법에 관한 율법들, 5)코다심:성소와 제사의식에 관한 율법들, 6)토호로트:레위인의 정결에 관한 율법들. 


3). 노동 쟁의 따위를 비밀히 지도하는 선동 지령 본부, 지하 운동자의 비밀 집회소나 지하 본부


4). 메시야의 원수로 궁극적인 파멸을 당하게 되는 사단의 후손을 가리킨다(창3:15).


5). 마23:37-38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6). 눅19:41-44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룰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έπισχοπή 조사, 감독, 방문 등을 의미하는 말로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사 구원하려 오심을 뜻)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7). 약3: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8). 막2:27-28  또 가라사대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9). 창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행14:17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마5:44-45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