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35 10:22-42 영생의 삶, 영벌의 삶
주님의 양의 문으로서 구원의 유일한 통로가 되십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하여 생명을 주심으로 부활하시었고, 우리 또한 그 사실을 믿음으로 영생의 삶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실 신앙의 진리는 과학적인 진리나 철학적인 진리와 같이 복잡하고 논리 정연한 것이 아니라 어찌 보면 지극히 단순합니다. 단순하기에 모든 사람이 신앙의 진리를 접근할 수 있고, 심지어 어린아이일지라도 신앙의 깊은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적 진리를 깨우치는 최소한의 방법은 믿음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믿음으로 거듭나야 우리 심중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믿음으로 거듭나지 아니하고 불신앙으로 주님의 말씀을 대한다면 실족하기 쉽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주님의 말씀을 깨우치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러한 양상이 유대인들 사이에 너무나 극명하게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은 수전절의 절기를 맞이하여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수전절은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라는 사람이 국고를 채우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고 성전의 번제단이 있던 자리에 이교도의 제단을 세우고 제우스 신에게 제물을 드렸는데 이에 대항하여 마카비를 중심으로 유대인들이 연합하여 독립전쟁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승리한 후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고, 율법대로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식을 회복하였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주전 164년부터 12월 25일을 ‘수전절’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는 수전절의 때를 겨울이라고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수전절에 성전에 올라가시어 솔로몬의 행각이란 운집처소에 다시시게 되는데, 평소에 예수님에게 반감을 많이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이 주님을 에워싸고 말하기를 자기들을 의혹하게 한다고 대적하는 불신의 행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22절에서 24절의 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2.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 다니시니 24.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수전절의 절기를 통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이자 유대인들은 솔로몬 행각에 다니시는 주님을 중심으로 에워싸고 자기들을 의혹 한다고 항의합니다. 이들이 그렇게 주님에 대하여 반박하고, 대적하였던 주된 이유 중에 하나가 그들의 기득권이 경각에 달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모든 이스라엘의 종교적, 정치적인 문제를 그들 중심으로 해결하여 나아갔는데, 주님의 사역이 시작되자 주님 앞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그러하니 자기들의 입지가 얼마나 작아졌겠습니까?
또한 유대인들이 주님을 대하여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이유는 주님께서 기존의 제도와 틀을 엎어버리고, 말씀의 권위와 권세로서 백성들의 심성에 불을 밝혀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뿐 아니라 주님은 사사건건 자기들의 사역에 문제점을 지적하고, 심지어 정죄하여 버리니 유대지도자들의 집단적인 반응이 어떻게 나타났겠습니까? 오늘 말씀 그대로 주님을 에워싸고 그 동안 갈고 갈았던 서슬파란 경멸의 눈빛으로 주님을 응시하고 당장이라도 일낼것처럼 모두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흐르자 그들중 실력자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여든 밝히 말하시오” 주님이 언제 유대인들의 말과 같이 군중을 우롱하고 기만하였습니까? 주님은 진실한 언어로 하늘의 메시지를 온 백성에게 증거하시였고, 당신의 생명을 담보로 그 진실한 메시지를 온 천하에 증거하시였습니다. 단지 그들의 지각이 열리지 않아 과거에 그랬던 거와 같이 오늘도 그렇게 주님을 시종일관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우리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과 연대하여 정면대결내지는 정면돌파를 시도하려고 하였을 것인데 주님은 이 순간에도 침착을 잃지 않으시고 유대인들이 주님을 대적할 수밖에 없는 진정한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여 주십니다. 25절부터 26절의 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 하는 것이어늘 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이들 유대지도자들이 현실적으로 불신의 나락에 빠져 그렇게도 주님을 대적한 이유는 주님의 말씀과 그 행위를 믿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주님이 지적하십니다. 그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었더라면 주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지각이 있었더라면, 그 중증의 영적 장애를 입지 않았을 것을 한사코 그들은 주님을 구원의 주로 모셔들이지 않고, 되리여 율법을 구원의 수단으로 받아들였기에 자기들도 구원을 얻지 못하였고, 자기들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도 구원에 참여하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그렇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주님의 양이 아니였기에 주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을 바라보면서도 믿음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드럽게 말해 주님의 양이 아니지, 좀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유대인들-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바로 뱀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용어를 세례요한은 그들의 면전에 침을 내뱉듯이 쏟아 부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백성들에게 세례를 베풀때에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요한에게 찾아옵니다. 그때에 세례요한은 그들을 보면서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마3:7)”고 호통을 칩니다. 이뿐 아니라 주님도 유대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다(마12:34)”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들은 본문의 양과 대조하여 염소라 부를 수 있습니다(마25:31-46). 주님이 마지막 날에 영광의 보좌에 앉으사 얌과 염소를 분별하실 것인데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둘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염소라 지칭된 자들은 저주를 받은 자들로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 영벌의 삶 한복판에 들어갈 것을 말씀하십니다(마25:41,46)1).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니 당연히 구원받은 백성으로 알았고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이방인들을 보면 그렇게도 무시하고, 유난히도 선민사상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구원은 어떠한 혈통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요1:12-13)2)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전가 받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롬10:9,10)3).
이러한 자를 오늘 주님은 내양이라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영생의 삶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25:34)4). 그리고 양들편에서의 반응은 유대인들과는 달리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주님을 따를 것이라고 유대인들과 대조하여 말씀하십니다. 그 양들 가운데 우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27절부터 30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양은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영생의 삶을 삽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갈급하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양들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과 같이 주님의 음성에 대하여 사모하는 정이 있습니다. 또한 그 음성을 듣는 것뿐이 아니라 지켜야 삽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신앙이라면 주님의 음성을 따르는 것은 그 행위라 할 것입니다. 신앙과 행위가 같이 나란히 갈 때 온전히 성도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젓가락 두짝이 나란히 놓일 때 그 역할을 기대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신앙과 행위 중 하나만 존재한다면 남에게 상처주기 싶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말씀과 같이 양은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주님을 따르는 것이 진실한 양의 모델이 됩니다(27). 이러한 자들을 주님은 안다고 말씀하십니다(마7:21-23)5). 그리고 그들에게 영생의 삶을 주실 것인데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것이요, 그 담보로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의 손길, 예수님의 손길이 보증하신다고 합니다. 주님의 손으로 양들의 삶을 보증하시니 그 영생의 삶은 영원토록 지속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손길은 강한 손이요, 능하신 손입니다(출13:3, 9).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신음할 때 그들을 권능의 손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손은 인생의 생사화복을 전권으로 주장하시며(신32:39)6), 그 손으로 모든 만물을 아름답게 빚으셨습니다(시8:3,9)7). 그리고 주님의 손은 의로운 손이십니다(사41:10)8).
이렇게 소중하신 예수님의 손이 우리의 생명을 지키니 그 누가 빼앗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길에서 그 어느 누가 양들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과 아버지는 하나라는 사실을 주장하십니다. 이 말씀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한 본질이요, 한 성품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선포하자 유대인들은 즉각적인 거부반응을 일으킵니다. 그 반응의 내용이 무엇인지 31절부터 33절까지의 말씀을 주의하여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31.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32.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하느냐 33.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주님은 이제까지 소경의 눈을 뜨게하시였고, 38년된 병자를 치료하시었고, 굶주린 수많은 백성을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이셨고, 간음 중에 잡힌 여인에게 새로운 삶이 기회를 부여하시는 등 그 누구도 감행할 수 없는 선한 일을 아버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셨습니다. 이러한 선한 일은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였는데도 불구하고 오늘 유대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하려 들지 않고 돌을 들어 치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하여 기가막힌 듯 참람(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하여-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하는 행위- 견딜 수 없다고 억장을 부립니다. 이렇게 극렬하게 타오르고 있는 유대인들의 분노 앞에 주님은 다시 한 번 하나님과 당신 사이의 하나됨을 자세하게 설명하여 주십니다. 이제 34절부터 39절의 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36.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37.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39.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주님은 당신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유대인들이 그렇게 의지하였던 율법을 들어 그 정당성을 말씀하십니다.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34)” 이 말씀은 시편82:6의 말씀으로 하나님을 대신하여 재판권을 위임 맡은 자를 가리켜 ‘신’이라 하였거늘 하나님께서 보내시어 이 땅에서 선한 일을 하시는 주님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에 대하여 이론의 여지가 없음을 말씀하시는 내용-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35)-입니다. 이 사실을 만일 수용할 수 없다면 이차적으로라도 주님의 행하시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됨을 깨달아 알라고 촉구하십니다(37-38).
이 정도가 되면 아무리 강퍅한 심령이라도 믿음이 발생할 것같은데 도무지 생명의 온기 즉 믿음의 온기가 그들의 싸늘한 가슴에 감돌지 않고 도리어 주님을 에워싸고 잡으려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끝까지 영벌의 삶을 집요하게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믿음이 없어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유대인들이 운집한 솔로몬의 행각을 떠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백성들이 많이 운집한 요단강 부근으로 가시어 영생의 삶을 가져야될 무리들을 만나주십니다. 40절에서 42절의 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40.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41.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42.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여기에서 인상적인 말씀은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말한 것이 무엇인가? 영생의 삶을 소유한 자들이 동의한 내용이 무엇인가? 그것은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몰이해하였던 “하나님의 아들 예수(요1:34)”이십니다. 영생의 삶을 소유한 자들 앞에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즉 하나님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삶을 지켜주시고, 신령한 삶을 지탱하여 주실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1). 마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2). 요1:12-13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3). 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4). 마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5). 마7:21-23 /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저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6). 신32:39 이제는 내가 그 인줄 알라 나와 함께 하신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
7). 시8: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8). 사41:10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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