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36 11:1-16 우리도 주님의 친구
여러분은 가장 친한 친구가 몇이나 있습니까? 제가 생각하는 바로는 우리가 가깝게 지내는 친구가 열 손가락에 뽑으면 그 사람은 부요한 사람이요, 다섯 손가락에 뽑으면 중간적인 사람이요, 다섯 손가락에도 없다면 그 사람은 빈약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되어 집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하여 있습니까? 저는 빈약한 사람에 속하는 것같습니다. 교제하는 사람은 많은데 진정으로 가슴을 열고 교제할 수 있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에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니 한 사람도 세상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는 빈약한 사람이요, 교제의 폭이 좁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는 것은 이렇게 빈약한 사람을 친구로 삼아 비밀없이 지내주시는 분이 계시니 본문의 예수님이십니다(요15:13-14)1). 예수님은 강하지 못하여 무능력한 자를 친구로 삼아주십니다. 주님은 약하고 불완전한 자를 친구로 삼아주시는 분입니다. 또 예수님은 힘없고, 병든자, 소외된 자(문둥이)를 친구로 삼아주십니다. 1절과 3절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더라 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1절과 2절에 등장하는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는 평소에 주님과 가까이 지내는 사이입니다. 이 가정은 부모가 없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주님이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는데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밤에는 주로 이들의 집에 쉬시는 일이 습관이 되었기에 주님과 이들 가정과의 사이는 각별한 사이였습니다(마21:17, 눅10:38-42).
이 형제들 중에 마리아(2)는 다른 이와는 달리 말씀을 사모하는 신앙이 있었는데, 그 신앙이 매우 귀한 향유, 순전한 나드2) 한근, 삼백 데나리온의 액수, 한 옥합을 주님 앞에 깨고, 부음으로 주님을 기념하였습니다(마26:6-13, 막14:3-9, 요12:1-8). 마리아가 주님께 이토록 헌신적일 수 있었던 것은 그녀에게 말씀을 사모하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와 같이 연약하고 보잘 것 없지만 주님을 적극적으로 영접하는 자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대부분 자기와 조건이 맞아야 친구로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연약한 자들을 친구로 삼아주시는데 도와주시는 친구가 되십니다. 그러하기에 오늘 본문에 나사로의 누이들은 주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간청합니다. 사실 우리 인생을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것중에 하나가 질병입니다. 병이 한 가정의 식구를 사로잡으면 그 가정이 기울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병고는 예나 지금이나 가정에 우환을 가져다줍니다. 그러하기에 나사로의 누이들은 주님의 치유능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 치료의 손길을 청구합니다. 이들의 청구를 들으시고 주님은 어떠한 반응을 보이십니까? 4절부터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이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병든 나사로가 사경을 헤메이자 그의 누이들은 사람을 보내어 주님이 급히 오시기를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죽을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나사로에게 있는 생명의 등불이 꺼질 것만 같은데 주님은 죽을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찌 보면 나사로의 가정과 주님 사이의 관계가 위기 가운데 처한 것 같습니다. 나사로의 누이들은 한시가 바쁜데, 의원을 쓸 겨를도 없이 나사로는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주님은 태연하시게도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다고 기록합니다(6). 이러한 주님의 모습이 어찌 연약한 자의 친구요, 소외된 자의 친구가 되실 수 있겠습니까? 또 나사로의 가정을 사랑하였다(5)고 볼 수 있겠습니까? 나사로의 누이들 입장에서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보고 근시안적으로, 현상적으로 판단하여 보면 주님께 대한 믿음의 무기력함과, 주님께 향한 헌신이 전혀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아니 이를 넘어서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을 수 있고, 관계의 단절까지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믿고 따를 때 나사로의 누이들과 같은 입장에 처할 때가 얼마나 많이 믿음의 생활 가운데 시시각각 찾아오는지 모릅니다. “내가 신앙 생활해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어, 교회에 그렇게 많은 시간과 돈을 갖다 바쳤는데,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무엇인가?” “결국 나 혼자 밖에 아무도 없어!”라고 단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봉착할 때가 어찌 한두번이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분명하게 나사로의 가정에 찾아온 불행을 이해하시였고, 생명의 처방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4)”
나사로의 가정이나, 우리나 주님을 친구로 삼아 얻을 수 있는 유익과 축복이 있다면 우리 인생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생명입니다. 죽을 인생에게 기대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요, 복되고 강건한 생명입니다. 지금 수많은 병원의 병상에 누워 신음하고, 괴로움 가운데 있는 생명이 아니요, 무서운 암과 같은 질병에 걸리어 일시적인 생명을 사는 그러한 저급한 생명이 아닌 강하고 복되고 영속적인 생명입니다. 그 주님은 생명의 오아시스로 사막과 같은 이 땅에 오시였습니다. 그리고 참 생명이 무엇인지 밝히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러한 주님의 계시활동을 우리는 친히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7절부터 10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주님의 친구 나사로의 가정에 불행이 닥치자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사는 지역인 유대로 다시 가자고 권유하십니다. 유대지역이 어떠한 곳입니까? 그곳에서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에워싸임을 당하고(10:24), 돌던짐을 당할번한 지역입니다(10:31). 그러하기에 제자들은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주님은 당신의 백성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시는 진실한 친구되십니다.
구약에 보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라는 다니엘의 친구들이 하나님 앞에 뜻을 정함으로 느부갓네살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자, 반역죄로 몰려 풀무불 가운데 던짐을 당할 때 주님은 그곳에 찾아가시어 그들을 용광로와 같은 처소에서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고, 옷의 빛도 변하지 아니하고 심지어 불탄 냄새도 나지 아니하도록 지켜주셨습니다(단3:24-30). 또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기도했(단6:7-9)다는 이유로 정치동료들에게 모함을 당해 사자굴에 던짐을 당하였을 때에도 굶주린 사자들의 의식을 멈추어 그 생명을 지켜주셨습니다(단6:23).
오늘도 주님은 당신의 친구 나사로가 있는 유대지역을 찾아가십니다. 그곳은 죽음이 기다리는 곳이요, 음모가 가득한 곳이기도 합니다(요13:1)3). 그러하기에 제자들이 주님의 신변에 위협을 느껴 만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당신이 그곳에 가야될 이유와 필요성을 말씀하십니다.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이 말씀은 당신이 생명의 빛(요1:4, 8:12, 9:5, 고후4:6)4)이란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볼 때에 실족하지 아니할 수 있고, 주님을 보지 아니하고 외면하면 실족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생명의 빛과 능력을 가지고 지금 베다니로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지체하시는 동안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가정은 슬픔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11절에서 16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13.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주님이 잠시동안 지체하시자 베다니의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이 사실을 주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11)”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깨우러 가노라고 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죽음에 대하여 잠들었다는 표현을 종종 씁니다(열상2:10)5). 성경 기자가 그렇게 사용하는 것은 부활을 전제로한 표현법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도 사람의 죽음을 잠잔다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성경에서 잠잔다라는 표현과는 엄연하게 다릅니다. 글을 쓰는 작가들은 죽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잠잔다고 쓰지만 성경은 이러한 표현을 넘어서 부활을 전제로 한 표현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부활을 사도바울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기록합니다(고전15:20)6).
주님은 생명의 주가 되시여 사망 가운데 누워있는 친구 나사로를 깨우러 가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러한 주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답답하다는 듯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이 말이 어떠한 말입니까? 주님 나사로는 이미 죽었습니다. 차라리 유대지역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낫지 않습니까?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오해하자 주님은 “나사로가 죽었느니라”고 밝히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 동안 지체하였던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주님은 나사로가 죽음에 임박하자 일부러 지체하시였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제자들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함입니다. 둘째로는 죽은 나사로를 살림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냄으로 당신께서 친히 생명의 주가 되심을 알리시기 위함이였습니다. 제자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유대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단호하게 명령하시자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고 있다가 디두모(헬라어)라는 도마(히브리어)가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동의합니다. 저같으면 “우리도 주님과 함께 살러가자”하였을 것인데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합니다. 물론 유대지역에 위험과 모험이 있어서이겠지만 적어도 주님의 제자라면 살러가자고 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도마가 주님의 말씀에 동의를 구하자 하나둘씩 서로 눈치를 보면서 주님과 함께 유대지역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다음 주에는 베다니의 나사로의 집에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믿음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친구되신 주님의 사랑과 관심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친구로 삼아주셨습니다. 연약하고, 무능력한 우리들을 당신의 친구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친구되십니다. 우리는 마음을 열고 우리의 모든 것을 그분께 고민의 보따리를 풀어놓는 그러한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주님과의 우정을 지속하는 방법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주님과의 관계가 지속될 수 있습니다.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에게 말씀을 사모하는 믿음이 있었던 것과 같이 우리도 그러한 믿음이 있어야 주님과의 지속적인 관계가 유지, 보존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있어야 일시적이고, 불완전한 생명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빈약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신 이상 절대로 나약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만은 아닙니다. 주님을 힘입어 세상에서 강하고, 담대하게 일어서는 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1). 요15:13-15 /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는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2). 히말라야 산 최고급 향료로 유대에서는 귀한 손님이 방문하면 향기름을 머리에 발라 극진하게 환영하는 풍습이 있었다.
3). 요13:1 유월전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4). 요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고후4: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5). 열상2:10 다윗이 그 열조와 함께 누워 자서 다윗 성에 장사되니.
6).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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