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요6:1-14 오병이어의 기적

아론33 2009. 3. 17. 20:13

  JOHN17  6:1-14  오병이어의 기적


  1. Μετά ταΰτα ʾαπηλθεν ʿο ʾΙησοΰς πέραν την θαλάσσης της Γαλιλαίας της Τιβεριάδος  2. ʾηκολούθει δέ ʾαυτω ʾόχλος πολύς ʿότι ʾεθεώρουν τά σημεια ʿά ʾεποίει ʾεπί των ʾασηενούντων   3. ʾανηλθεν δέ ʾεις τό ʾόρος ʾΙησους καί ʾεκει ʾεκάθητο μετά των μαθητων ʾαυτοΰ 


  요한이 요한복음에서 강조하고 있는 중요한 단어는 믿음과 생명입니다.   주님의 메시지를 접한 사도요한이 내린 결론은 바로 믿음으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하여 요한은 주님의 다양한 사역과 말씀을 통하여 믿음을 강조하였습니다(요1:12, 2:11, 3:16, 4:21, 4:50, 5:24, 5:46-47).   그 중에서 우리는 요한을 비롯한 제자들이 주님의 이적적인 사건과 진리의 교훈을 통하여 그들의 믿음이 주변의 많은 군중보다는 더하였을 것이라는 기대를 쉽게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그러한 상상을 원점으로 돌려버립니다.  믿음의 성장은 사실상 주님의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그러한 주님께서  제자들의 믿음에 관하여 오늘 본문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적인 사건에 앞서 제자들을 시험하시는 주님의 의도적인 말씀(6)1)을 접할 수 있습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제자들로부터 보시기 위해 제자들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시험하심에 좋은 점수를 얻지 못하였고,  오히려 한 아이의 믿음이 돋보입니다.   본문은 먼저 제자들을 시험하신 장소와 시간 그리고 그 배경을 먼저 소개합니다.      1절에서 4절의 말씀을 살펴봅니다. 


  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3.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장소는 갈리리 바다 였습니다(1).  예수님 당시에 갈릴리 바다는 여러 명칭을 가지고 있었는데 디베랴 바다, 긴네렛(민34:11) 호수, 게네사렛 호수(눅5:1)등으로 불리었습니다.   그 중에서 ‘디베랴’라는 명칭은 공식적인 문서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으로 A.D. 20년 경 헤롯의 아들이요 갈릴리의 분봉왕(지방의 작은 왕) 안디바스(4B.C.-39A.D.)가 이 갈릴리 바닷가에 수도 서울을 건설하고 당시의 로마 황제 디베리우스를 기념하기 위해 호숫가 근처에 도시 ‘디베랴’를 세운 이후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길릴리 바다의 주변에는 높은 산들이 둘러서 있고 바다 한복판에는 이따금씩 돌풍 현상이 주위의 지형적인 영향으로 인하여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막4:35-37).  

  시간은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 시기였습니다(4).   예수님의 집중적인 선교활동은 3년간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 두 번째 맞으시는 유월절 가까운 시기였습니다(요2:13 성전정화, 6:4 오병이어의 기적, 11:55 십자가에서 죽으심).   유월절은 유대인들의 가장 큰 명절일로 모세의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 절기는 죽음의 천사가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을 넘어 애굽 사람들의 집으로 향한 역사적 사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배경은 여느 때와 같이 주님 곁에는 큰 무리가 따랐습니다(2).  그 이유는 병인들에게 행하는 표적을(마9:35)2) 보았기 때문에 많은 인파가 주님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일반적으로 표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실을 전하곤 하였는데 오늘 본문 이후에 있는 말씀을 보아도 생명의 양식되시는 것을 집중적으로 전파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 표적은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이끌도록 작용하였습니다.  그러한 동기가 직접적인 이유가 된 것이 주님으로부터 바람직한 모습으로 보시지는 않으셨습니다(4:48, 6:26).  사실상 표적에 의존하는 믿음이 높은 수준의 믿음으로 나아가지는 못하여도 어느 정도의 믿음을 이끌어냅니다.  주님은 이러한 방식으로 주님께 나오는 자들을 거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표적을 기대하여 나아온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드러내어 주셨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갈릴리 바닷가에 모인 수많은 민중들을 향하여  하늘의 메시지를 전하심에 여념이 없으셨습니다(막6:30-34)3).

  주님은 하나님의 사역에 헌신하심으로 참으로 바쁘신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에서 그 얼마나 행복하셨을까요?   지금 수많은 사람들은 자기 일이 없어 거리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이 그 얼마나 많습니까?  무위도식하는 무리들이 세상에 그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은 이러한 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바울의 입을 통하여 명하셨습니다(살후3:10-12).  반면에 자기 일신의 만족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은 주말이면 어디로 쏟아져 나아옵니까?  유흥가로, 사창가로 아니면 레저와 문화가 있는 야외로 자기의 만족을 추구하기 위해 쏟아져 나아갑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과 그 민중들은 빈들로 나아와 주님의 꿀송이와도 같은 말씀에 은혜의 도가니에 훔뻑 빠져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분위기를 생각하건대 너무나 훈훈하고,  정겨운 웃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면서 ‘내게 강같은 평화’라는 복음 송을 마음에서 우러나와 불렀을법합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났을까요?  영의 양식을 주님께 몰입하여 풍성히 먹다가 그만 날이 저무는지도 모른 채 육의 양식을 찾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식욕이 왕성하였던 젊은 주님의 제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님께 청합니다.  막6:35절과 36저를 읽어봅시다.


  막6:35-36  때가 저물어 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 가매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제자들4)이 주님에게 내어놓은 대안은 각자 자기의 자비로 양식문제를 해결하자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제안을 합니다.   어찌 보면 지극히 현실적인 대안이였습니다.   제자들은 사실 예수님에게 찾아온 무리들을 먹일 수 있는 재정적인 능력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로서는 주님에게 제안한 청구가 당연히 받아들여질 것을 의심 없이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제자들을 향하여 ‘우리’라는 용어를 사용하심으로 그들의 굶주림의 문제를 우리가 해결하여 보자고 역으로 제안하십니다.  지금까지 많은 표적을 보아왔다면은 주님을 중심으로 하여 이적적인 방법을 가지고 육신의 양식을 해결하여 보자는 제안이십니다.  그러나 그러한 제안의 참된 의미를 모른 제자들은 그 얼마나 당황하였겠습니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제자들은 그래도 그 중에서 가장 잘 산다고 자타가 공인할만한 사람 빌립을 응시합니다.   아니면 주님의 제자들 중에 먹는 문제를 책임지었을 빌립에게 시선을 집중합니다.  아니면 제자들 중에 빌립이 가장 윤이나는 옷을 입었는지는 몰라도 주님은 당신의 제안을 빌립에게 직접 물어보십니다.  5절과 6절을 읽어보십시다.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주님은 빌립이 다음과 같이 고백하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 문제는 간단한 것 아닙니까?  우리가 떡을 살 필요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주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주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되시니 우리를 먹이고도 남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우리가 한 말씀이라도 더 영혼의 양식을 듣겠습니다’라는 기대를 가지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은 자신이 없다는 듯 동전 몇 개를 달그랑하면서 주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7절을 읽어보십시다.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 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주님께서 바라는 대답을 빌립은 마치 씨름선수가 상대방을 들배지기로 뒤집듯이 뒤집은 것입니다.  그의 대답의 뜻은 이렇습니다.   ‘주님 참으로 어렵네요, 각 사람이 아주 간략한 식사로서 다른 것은 전혀 없이 떡으로 요기만을 한다해도 이 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겠나이다’  이 백 데나리온이라 함은 성인 8개월간의 임금(150*8=1200만원)이 됩니다.   즉 지금 주님에게로 나아온 큰 무리를 먹일려면 한끼의 식대가 1200만원이 든다는 말입니다. 

  빌립은 주님의 시험하시는 물음에 십분의 일도 대답지 못하고 뒷머리가 극적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빌립의 연약한 믿음을 우리를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바로 발밑에서 위대한 교훈과 이적적인 권능을 체험하고도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빌립의 나약한 모습을 우리는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주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자신을 극복하지 못하고,  언제나 연약에 쌓여 손발을 움직이지 않는 메아리 신앙을 갖지는 않았는지 깊이 반성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절망하지 말고 주님에게서 소망을 발견하여야 하겠는데,  주님께서 그 연약한 것을 꾸짖지 않으시고 감당하여 주셨다는 사실입니다(롬5:6-8)5). 우리가 연약합니까?  나약합니까?  그래도 주님을 바라보면 소망의 문이 열립니다.

 빌립이 무기력할 정도로 얼굴에 홍조를 뛰고 서 있을 바로 그때 어린 아이 하나가 안드레의 손을 빌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옵니다.  어린아이의 대응과 주님에게의 응답은 위기를 돌파하는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린 어린 아이의 종교생활을 제지하여도 아니되겠고, 오히려 그들을 주님 앞에 세우는 것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8절과 9절을 읽으십시다. 


  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안드레는 빌립보다는 좀더 한 걸음 나아간 믿음을 보입니다.  아마도 주님은 안드레의 적은 신앙을 기뻐하셨을 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안드레는 오병이어을 많은 사람의 식사로 이어질 것에 대한 일만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9).  그리고 안드레는 자기의 형에게 주님을 소개할 때 메시야라고 하였습니다(요1:41).     그렇지만 그러한 안드레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깊은 속은 빌립의 고백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였습니다. 

  그렇지만 무명의 한 아이는 적은 것을 크게 보았습니다.   마치 구약의 위대한 능력의 선지자 엘리사가 본 사람의 손 만한 적은 구름(열상18:44)이 메말라 죽어 가는 대지를 적시는 큰 폭풍우로 바뀌어진 것과 같이 한 아이의 적은 헌신은 주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의 풍족함과 만족함으로 이어졌습니다.

  마침내 주님의 진리에 대한 수고스러운 열정과 교훈 그리고 능력이 한 아이의 믿음을 통하여 크게 수확되어진 것입니다.  한 아이는 주님의 말씀에 올바로 응답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우리가 해결하여 보자고 제안하셨을 때에 제자들은 무기력한 대답들을 열거하여 놓았지만 한 아이는 하나님 되신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파악하고 정확히 응답한 것입니다.  한 아이는 제자들과 같이 사람과 자기들을 바라보면서 생각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능력과 자기의 믿음을 연결하여 반응하였을 때 주님의 권능이 크게 빛나게 된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무엇을 바라서 도시락을 싸들고 빈들로 나아왔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그를 그 황량한 빈들로 나아오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듣자 주님이 참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인 것을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오병이어를 주님 앞에 드려 나누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 사랑이 드러날 것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오늘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주님은 그 어린아이의 정성을 모두어 하나님에게 축사6)하십니다.  그 때에 마치 오병이어의 작은 것이 큰 것이 되는 위대한 신적인 권능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기한 듯, 넋을 잃은 듯이 그 광경을 바라봅니다.  그 순간 시간이 정지된 듯 정적과 감격이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큰 무리들은 구약에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만나를 먹이운 사실을 기억하였을 것입니다7).  그때에 주님께서 친히 떡과 고기를 원하는 대로 나누어주십니다.    10절부터 11절까지를 읽어보십시다.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않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주시고 고기고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올바로 응답하는 믿음은 이와 같이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믿음은 주님의 능력을 드러냅니다.  믿음은 풍족한 현장을 만들어 갑니다.  만일 주님의 권능이 제자들의 인색함과 같이 나타났다면 서로가 먹겠다고 아우성 거려 혼돈과 무질서를 만들어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아이의 온전히 드리는 믿음이 풍족한 광경을 만들었습니다.  넉넉함은 질서로, 질서는 곧바로 일시에 수많은 사람들을 아름다운 교제묵어놓았습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적인 권능은  여유와 기쁨이라는 꽃망울을 터뜨렸습니다.   믿음은 이와 같이 주님의 사랑을 더더욱 빛나게 합니다.  한 아이의 분명한 믿음의 행동이 이러한 광경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렇게 영육간에 풍족한 자리에서 화기애애할 때 주님이 가만히 무기력할 정도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2절로 13절을 읽어봅시다.

  

  12.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큰 무리 즉 어린아이를 포함하여 대략 2만명 정도의 숫자가 넉넉히 먹어 배부른 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뒷정리를 명하시면서 남은 조각을 거두어 낭비가 없도록 명하십니다.   그리고 남은 식량을 조사하니 보리떡 열 두 바구니 가득히 남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제 생각에는 우둑커니 서 있던 제자들에게 한 바구니씩 주었을 것입니다.     이제 큰 무리들이 주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교훈을 깨닫고는 생각을 정리하여 14절과 15절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디로 발길을 돌리십니까?  14절과 15절을 읽어봅시다. 


  14.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사람들은 주님의 오병이어의 표적을 목격하고 모세가 아주 먼 옛날에 예언한 선지자로 이해하였습니다(신18:15)8).   사람들은 모세가 광야에서 양식을 공급해 준 것같이 주님께서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표적을 보고서 이같이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보이는 세계의 왕 즉 세속적인 군주로 등극하시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정치적, 군사적, 폭력적인 방법으로 다스리는 세속적이고, 타락한 왕으로 서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타락하게 하는 죄를 몰아내고, 그 위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려는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일시적인 왕이 아니요,  영원한 왕으로 오셨기에 소수가 원하는 또한 소수의 만족만을 위한 왕이 아니라 인류 전 세계의 진정한 왕이셨기에 그들의 지극히 이기적인 제안을 뿌리치신 것입니다(요18:36-37)9)


    오늘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하였고,  큰 무리들은 주님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아이는 주님의 교훈 위에서 그 권능을 이해하였고 예수님 앞에 오병이어를 드림으로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게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한 아이의 믿음을 본 받아 하나님을 향하여 믿음으로 올바로 응답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 . 시험: 예수님의 시험은 믿음을 단련시키거나 돈독시키어 세우고자 하시는 의도지 결단코 미혹에 빠뜨리는 사단의 시험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눅4:2, 고전10:13, 신32:10-12)


2). 마9: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 막6:30-34  30.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31.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깐 쉬어라 하시는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이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33.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4). 마10:2-4  열 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다대오, 가나안인 시몬과 및 가륫 유다 곧 예수를 판자라.


5). 롬5:6-8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6). εύχαριστήσας로 이 말은 감사의 기도를 의미하며, 특히 음식물을 받고 감사하는 경우에 자주 쓰이는 말. 


7). 시78:23-25 / 그러나 저가 오히려 위의 궁창을 명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  저희에게 만나를 비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으로 주셨나니 사람이 권세 있는 자의 떡을 먹음이여 하나님이 식물을 충족히 주셨도다.     계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8). 신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9). 요18:36-37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 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