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5:19-29 하나님이신 예수님, 생명이신 예수님
JOHN15 요5:19-29 하나님이신 예수, 생명이신 예수.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잘못된 종교적 신념을 주님에게 맞추어 수정하지 못하고 자기들에게 맞춤으로 예수님의 진실성을 바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너무나 중요시 여기고, 모세 이상의 권위를 그 어디에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의 선하신 행위가 안식일에 베풀어지자 예수님을 거부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과 극한적인 대립을 보였던 것입니다. 즉 모세가 기록한 율법과 주님의 말씀과 행위를 도저히 조화시킬 수 없었던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핍박하게 된 것을 다른 측면으로 보면 모세의 글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미 모세는 자기가 기록한 모든 글을 통하여 풍성하게 그리스도를 예언하였습니다(신18:15)1). 이 사실을 주님이 직접 말씀(요5:46-47)하실 뿐 아니라 모세가 기록한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통하여 제자들의 싸늘한 심령을 뜨겁게 달구기도 하셨습니다(눅24:27). 그리고 주님은 율법 아래 나시어 그 율법을 지키셨습니다(갈4:4, 롬5:18)2). 사실 주님은 율법을 세우신 자 즉 입법자로서 율법을 지키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대표로 자원하여 지키심으로 의를 이루신 것입니다. 의는 하나님의 법을 다 지킴을 말하는데, 이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는 생존권을 얻게되는 것입니다. 이 생존권을 예수님이 지키심으로 획득하시어 그를 믿는 백성들에게 전가할 의가 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기초하여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태도가 억지 해석이었으며, 잘못된 해석이었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난주에 생각한 대로 안식일에 주인 되신 예수님께서 선한 일을 하시자 비방하고, 핍박을 가하고, 협박을 가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에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하신다 함으로 하나님과 동등(빌2:6, 요1:1)3)한 사역을 감당한다고 하시자, 유대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을 죽이고자 합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모든 행위는 그리스도에 관한 진실성을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신적 권능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하나님 되심을 이해하지 못한데서 비롯되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보면 주님께서 당신을 심하게 오해하고 핍박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당신을 더 구체적으로 자상하게 보여주십니다. 19절과 20절을 읽어보시겠습니다.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19. ʾΑπεκρίνατο ʾουν ʿο ʾΙησοΰς καί ʾέλεγεν ʾαυτοις, ʾΑμήν ʾαμήν λέγω ʿυμιν ʾου δύναται ʿο ʿυιος ποιειν ʾαφʾ ʿεαυτου ʾουδέν ʾεάν μή τι βλέπη τόν πατέρα ποιοΰντα. ʿά γάρ ʾάν ʾεκεινος ποιη ταΰτα καί ʿο ʿυιός ʿομοίως ποιει. 20. ʿο γάρ πατήρ φιλει τόν ʿυιόν καί πάντα δείκνυσιν ʾαυτω ʿά ʾαυτός ποιει καί μείζονα τούτων δείξει ʾαυτω ʾέργα ʿίνα ʿυμεις θαυμάζητε.
예수님은 중요한 말씀을 전할 때마다 아멘을 맨 서두에 먼저 사용하십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이 용어를 기도의 끝이나, 공감되는 말씀 후에 사용합니다. 당시에 유대인들도 이 용어를 맨 마지막에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의 랍비들은 자기들의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 보통 자기 스승의 이름을 빌어서 사용했다고 합니다. 즉 자기들의 가르침이 자기보다 더 권위 있는 사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은 자신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최고권위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겔38: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렘2:10)의 형태로 전함으로 자신들의 선포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심에 있어서 랍비나 선지자의 언어습관과는 확연히 다른데,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전하시는 데 있어서 모세의 권위를 빌지 않으시고, 곧바로 하나님의 말씀은 친히 당신의 권위로써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진실로 진실로(아멘, 아멘)’라는 말을 서두에 사용하심으로 다음 강조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선포하신 예수님의 표현법은 당신의 말씀의 권위가 곧바로 당신 자신에게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모세나 다른 선지자보다 더 직접적인, 그리고 더 완벽한 하나님의 계시자임을 뒷받침해 줍니다.
본문에서도 ‘진실로 진실로’라는 표현을 먼저 내세우심으로 당신의 전하는 말씀의 중요성을 유대인들에게 일깨우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주님은 먼저 아버지와 아들의 동등성 내지는 사역의 유사성을 말씀하심으로 친히 하나님 되심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기 전에도 영원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하나님이 육신을 입어 사람들 가운데 거하신 것입니다(요1:14). 그러함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리스도를 아들로 호칭합니다(성육신의 차원에서)4). 그렇다고 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호칭이 단순한 우열의 차원을 넘어 본질에 있어서 동등성을 표현하는 용어입니다. 특별히 요한은 아버지란 단어를 많이 사용함으로 유명합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 덕분에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된 시각으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할 때 그 뜻은 하나님의 위대한 인격과 최고의 지위를 가지신 분이란 뜻입니다.
그러한데 그 아버지의 보어는 아들입니다. 본문에 보면 우리는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와 연관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아버지는 아들에게 당신의 행하시는 것을 보이시고, 아들은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봄으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하며, 더 큰 일을 봄으로 기이히 여기게 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은 아버지와 아들의 밀접한 관계를 가리키는 동시에 하나님과 동등 됨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분개하였으며, 당황해하였고, 신성모독의 죄인취급을 하였던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은 인간의 방식만을 고집한 결과 하나님의 방식으로 오신 주님을 거부함으로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핍박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본질에 있어서 동등일 뿐 아니라 사역에 있어서 유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역은 생명을 살리심에 있어서 동등하십니다. 21절을 읽어보시겠습니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ʾώσπερ γάρ ʿο πατήρ ʾεγείρει τούς νεκρούς καί ζωοποιει ʿούτως καί ʿο ʿυιός ʿούς θέλει ζωοποιει.
요사이는 사람의 생명을 해하는 것이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세계무역센터를 필두로 하여 죽이는 테러들, 이 테러들의 본거지를 응징하겠다는 보복전쟁, 그리고 재차 그 전쟁에 응수하려는 생화학테러전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TV나 영화에도 폭력이 너무나 범람하여 우리 인간들의 삶자체를 현실과 환상의 오차를 줄이고 있습니다. 미국은 자기들이 대테러를 당함으로 폭력영화를 자제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제서야 반성의 기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TV의 모래시계를 필두로한 조폭주제가 인기를 누리면서 이 주제가 영화로 옮겨져 약속, 친구, 조폭마누라로 이어져 전에 누리지 못했던 특수를 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유사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깝게 보아야 되는 실정까지 오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생이 어찌그리 타락하였습니까? 어찌그리 무모하고, 잘못된 것에 노출되어야 합니까? 왜 이리 이 사회의 의식과 수준이 낮아지고 있는지 우리는 깊이 있게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신앙을 잃고 영혼이 메말라 있는 삭막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음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아버지는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신다고 기록합니다. 즉 하나님의 역사는 살리는 역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심과 같이 아들도 죽은 자들을 살리심으로 사역에 있어서 동등하신 하나님이 되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에스겔서 37장을 보면 여호와의 신이 에스겔을 데리고 죽음으로 가득한 삭막한 골짜기-뼈가 가득하고, 아주 말라비틀어진-를 보이십니다. 에스겔이 그 장면을 목격하면서 깊은 사색에 빠집니다. 어찌그리 죽었는고, 어찌그리 비참한고, 어찌그리 무상한고 인간적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에스겔이 자신이 없는 듯 답합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 때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다음과 같이 대언하라 명하십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이렇게 에스겔이 대언하자 무서우리 만큼 고요하고 적막했던 죽음의 골짜기에 생명의 소리가 가득하게 됩니다.
뼈들이 소리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합니다.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이자 하나님께서 재차 에스겔에게 명하십니다. 인자야 생기에게 대언하여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 살게 하라고 하시니 그 명대로 실행하자 생기가 그 뼈들에게 들어가 큰 군대를 이루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죽음을 생명으로 회복시키시는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이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예수님의 사역도 역시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신다고 하십니다. 여기 본문에 나타난 자기의 원하는 자들이란 바로 당신의 백성(마1:21)5)을 말합니다. 이 백성을 살리는 길은 죄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인데 그 해방의 길은 다름 아닌 믿음의 길입니다. 믿음으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는 길입니다. 들음으로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24절부터 26절까지 재차 설명하여 주십니다. 한 번 읽어보십니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4. ʾΑμήν ʾΑμήν γέγω ʿυμιν ʿότι ʿο τόν λόγον μου ʾακούων καί πιστεύων τω πέμψαντί με ʾέχει ζωήν ʾαιώνιον καί ʾεις κρίσιν ʾουκ ʾέρχεται ʾαλλά μεταβέβηκεν ʾεκ τοΰ θανάτου ʾεις τήν ζωήν 25. ʾαμήν ʾαμήν λέγω ʿυμιν ʿότι ʾέρχεται ʿώρα καί νΰν ʾεστιν ʿότε ʿοι νεκροί ʾακουσουσιν της φωνης τοΰ ʿυιοΰ τοΰ θεοΰ καί ʿοι ʾακούσαντες ζήσουσιν 26. ʿώσπερ γάρ ʿο πατήρ ʾέχει ζωήν ʾεν ʿεαυτω ʿούτως καί τω ʿυιω ʾέδωκεν ζωήν ʾέχειν ʾεν ʿεαυτω
이미 주님은 3장 18절에 말씀하시기를 당신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정반대 편에 있는 말씀이 바로 24절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체적 생명의 도리는 잘 먹고 잘 입어야 삽니다. 이를 위해서 예나 지금이나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 살까하는 것에 초미의 관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육신적인 삶육신적으로 만족하는 삶은 반쪽만 사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삶은 육신적인 삶과 동시에 영적인 생명이 온전케 되어야 올바른 삶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영이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영이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야 합니다(요6:63, 68)6). 그러하기에 구약성경에 보면 들으라(쉐마)는 말씀이 수차례 반복되여 집니다(신6:4-5)7). 이와 같이 말씀을 들어야 개인의 영이 살며, 회복이 되고, 타락한 공동체가 일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25절에 기록된 대로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으면 살아날 것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죽은 자들이란8)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영적인 사망의 상태를 지칭합니다. 이 사망을 극복하기 위해서 생명 되신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살아날 수 있습니다. 이 듣는다는 것은 순종이라는 단어와 같이 어울리는 말씀으로 자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 주장을 접어두고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맞추는 것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가깝게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자기 주장을 포기하는 것이 올바른 들음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잘못된 안식일 주장을 접어두고, 정녕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치료하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안식일이 바른 안식일이라는 것을 주님이 몸소 보여주신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안식일 개념이 바뀌어야 바른 신앙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바른 신앙을 갖기 위해서 절대 진리로 오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야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생명의 풍성한 꼴9)로 가득차있습니다(요11:25-26). 그러함으로 주님은 참 생명이 되십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 주님이 진실로 라는 강조어를 맨 앞에 두어 듣는 청중들에게 일깨우고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생명을 얻는 길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듣고 믿지 않으면 일시적인 신앙, 주변적인 신앙, 무의미한 신앙으로 전락하였다가 영원히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올바로 듣지 아니하면믿음을 저버리면 주님의 영원한 형벌인 죽음과 파멸의 심판을 벗어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벌과 심판 내리심이 예수님으로부터 이루어질 것인데 이러한 내용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심으로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증명하는 내용입니다. 본문 22절, 27-29절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7. 또 인자 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하는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 말씀은 지금 당신을 거부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향한 최후통첩의 말씀과 같이 들립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너희의 잘못된 종교적 신념을 수리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에서 벗어나지 아니할 때 나의 심판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심판뿐 아니라 주님의 심판을 받는 영역이 온 우주적인 것을 말씀하십니다.
온 우주에 미치는 하나님의 심판권은 절대적인 성질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권리를 함부로 가지거나 행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그러한데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목적으로 하여 아들에게 그 심판권을 다 위탁하시고 그로 하여금 그 권세를 행하게 하셨다는 것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27절에 보면 그 권세자가 바로 ‘인자 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다’고 기록되여 있는데 여기에 인자란 구약의 다니엘서7:13,1410)에 예언된 인물로서 인자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영광의 주로 묘사 되여 있습니다(단7:9-12, 계1:12-16). 바로 인자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심판권을 가지사 심판을 집행하실 것입니다. 즉 인자는 하나님이요, 예수님은 하나님이란 사실을 직접적으로 증명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이 현세와 내세에까지 미칠 것인데 현세에서는 믿음의 유무에 따라서(25), 그리고 마지막 심판 때에는 이를 근거로 한 결정적인 대심판으로 이어질 것을 말씀하십니다(28-29). 요한복음을 들여다보면 이와 같이 불신 즉 믿지 아니하는 것을 매우 심각하게 다룹니다11).
오늘 본문의 말씀은 믿지 아니하는 자보다는 믿는 자들이 들어야할 말씀입니다. 믿음의 울타리에 들어온 우리들은 유대인들과 같이 답습되여온 잘못된 신앙적인 관행들을 주님의 말씀으로 수정하여, 말씀위에 서는 신앙을 사모하여야 할 것입니다. 말씀이 지적하는 것은 무엇이며, 말씀이 채짹하는 방향은 어디며, 말씀이 가르치느 교훈은 어떠한 것인지 경외심을 가지고 들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과 동등하십니다. 생명의 주가 되십니다. 선악간에 심판의 대권을 가지셨습니다. 그러하기에 주님을 공경함으로 우리의 삶이 주님 가운데 있는 삶으로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1). 신18: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2). 갈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 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롬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3).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4). 하나님의 인간적 표현방식 anthropomorphism. 하나님의 존재양식과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의 너무나 깊은 신비는 인간 세계에서 사용하는 말로서만 이해되지만 하나님의 본래 존재 양식이나 표현방식으로는 인간이 이해도, 감당도 못하기 때문이다.
5).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6). 요6: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6: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7). 신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8). 성경이 말하는 죽음이란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첫째는 육체적 죽음 이는 죄의 결과로 모든 육체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형벌(창3:19, 히9:27)로서 이 죽음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상태를 말합니다. 둘째는 영적죽음으로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이 분리되어 교제가 단절된 상태를 말합니다(엡2:1). 셋째는 영원한 죽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에서 분리되는 것입니다(살후1:9). 이 죽음을 요한은 둘째 사망이라고 했는데(계2:11;20:6,14) 한마디로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의미합니다(마25:46,막9:43-48)
9). 시23:1-3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
10). 단7:13-14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11). 요3:18-19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