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요3:16-21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아론33 2009. 3. 17. 19:48

  요한복음7강  3:16-21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와 외면하는 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사랑을 기반으로 존재합니다.  그 사랑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영적이든 간에 사랑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대지에 존재하는 모든 식물이나 생명도 사랑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되어 진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있게 된 것 역시 부모님의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 출석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법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얼마나 사랑합니까?   자기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로 바라보아도 예쁘고,  그것도 모자라 멀쩡한 아이를 심술궂게 물어보기도 합니다.   직장에서 한참 스트레스를 받아 집에 들어와도 자녀가 아빠, 엄마라도 부르면 우리는 그곳에서 삶의 의미를 되새기고, 힘든 세파를 견디어야 될 이유들을 발견합니다. 

  따라서 자녀는 우리의 내일이요, 보이지 않는 생의 희망이기도 합니다.    어떠한 사람은 무자식이 상팔자라고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로의 말에 지나지 않는 것같습니다.   그래도 자녀가 있어야 정상적인 가정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간혹 어떠한 집안에는 자녀가 귀하다 보니 무남독녀 외딸이라든가 몇대 독자라든가 하면 자식이 다칠새라, 뒤질새라 그 자녀에게 온 정성과 마음을 다 쏟아붓습니다.  

  이처럼 자식은 우리 기쁨의 원인이요, 사랑을 쏟고, 쏟아도 아깝지 않은 대상인 것입니다. 

  

  그러한데 우리만 자녀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만물의 하나님도, 우주의 아버지신 하나님도, 아들이 있으심을 본문에 기록합니다.  그분은 바로 독생자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세상을 사랑하신 이유로 인하여 교회에게 주셨습니다(계5:9c /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 주시는 방법은 그의 살을 찢어 주셔서 먹이시고, 피를 흘리사 마시우사 우리 영혼의 갈증을을 채워주신 것입니다(요6:55 /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참으로 많은 시간을 준비하셨습니다.  아주 먼 옛날 사람이 처음으로 창조되여 에덴 동산을 활보하고 다녔지만 그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기대에 못미쳐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창2:17, 3:6).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죄를 짖자마자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것을 표면화하셨습니다(창3:15).   내가 여자의 후손(별, 다윗의 자손, 고난 받는 종, 임마누엘)을 가지리라 그 후손으로 인하여 길을 잃었던 인생들을 내 사랑의 품으로 다시 안으리라고 계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을 얻기 위해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유다를 선택하셨고, 다윗을 선택하셨으며 2000년 전에는 다윗의 자손 요셉을 선택하시고 그의 부인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시키시어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눅1:34-38). 


  오늘 예수님의 이러한 성육신을 가리켜 본문16절에서는 독생자를 주셨다고 기록하고, 17절에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는 인기 연예인의 자녀들처럼 많은 사람의 관심을 몰고 오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조용한 가운데 단지 별들만이 주님의 오심을 반기었습니다.  그러나 천상에서는 위대한 노래가 들려왔습니다.  하늘의 허다한 천군과 천사가 함께 있어 하나님께 기쁨의 노래를 부릅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죄악의 깊은 잠에 빠져, 주님의 탄생을 기뻐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지만 하늘에서는 놀랍고, 경사스러움의 독생자 탄생을  온 천군과 천사들이 축하하고, 하나님은 너무나 기뻐하셨습니다.


  눅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찬송가112장)


  “ 1. 그 맑고 환한 밤중에 뭇 천사 내려와 그 손에 비파들고서 다 찬송하기를 평강의 왕이 오시니 다 평안하여라 그 소란하던 세상이 다 고요하도다. 

    2. 뭇 천사 날개 펴고서 이 땅에 내려와 그 때에 부른 노래가 또 다시 들리니 이 슬픔 많은 세상에 큰 위로 넘치고 온 세상 기뻐 뛰놀며 다 찬송하도다. 

    3. 이 괴롬 많은 세상에 짐지고 가는자 그 험산 준령 넘느라 온 몸이 곤하나 이 죄악 세상 살동안 새 소망 가지고 저 천사 기쁜 찬송을 들으며 쉬어라. 

    4. 옛 선지 예언 응하여 베들레헴 성중에 주 예수 탄생하시니 온 세상 구주라 저 천사 기쁜 노래를 또 다시 부르니 온 세상 사는 사람들 다 화답하도다”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시고 이 세상에 오신 일의 이유와 목적을 본문 16절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성경 전체의 요절로서 하나님은 주시는 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유는 사랑때문이요, 주신 내용은 독생자 그리스도요, 주신 목적은 주를 믿고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함이였다는 것입니다. 

  중세기의 신학자 안셈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온 우주 만물과 모든 인류를 다 합친 것보다 더 귀한 존재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를 회생시키셔서 우리 인류로 구원받게 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셨지만 세상을 당신의 품으로 안으셔야 했기에 그를 가장 낮은 베들레헴에 보내셨고,  가난한 가정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 보내셨으며,  장성한 이후에는 광야로 몰아내셨습니다(막1:12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십자가에 달리워 처참한 죽음을 당하도록 내버리셨습니다(마27:46 /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하나님께서 주님을 세상을 위해서 버리실 때 그 작열하게 타오르던 해도 빛을 잃었습니다(눅23:44 /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며).  

  또한 성소의 휘장(하나님이 마음)이 한 가운데가 찢어지고 말았습니다(눅23:45).    땅은 진동하였고, 바위가 터짐으로 하나님의 심정은 자연을 통하여 성전을 통하여 밝히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마27:51).

  옛말에 자녀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도 참으로 슬프셨습니다.  그러나 그 슬픔은 우리를 다시 안으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우리를 안으심로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 죄악의 누더기 옷을 씻어 희게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계7:14)    창세기에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심으로 그들의 수치를 덮으신 것과 같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으시도록 내어주신 것은 우리의 수치스러운 죄악된 행위들을  덮으시고 간과하시기 위한 것이였습니다.   마치 세상에서 주색잡기에 빠져 방황하던 탕자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혀 주셨던 아버지(눅15:22)와 같이 우리에게 하나님은 가장 아름다운 의의옷을 입혀주시기 위해 주님을 우리에게 내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인간 세계에 자식 사랑법은 심하게 이기적이고,  배타적입니다.  그러함으로 남보다 많이 주려고 하고,  남을 어떻게 해서든지 뛰어 넘어야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올바로 자식을 키워 준 듯 착각속에 살아갑니다. 

  그렇게 키운 자녀들이 공직이나, 사회지도층 인사로 발탁되여 만들어 놓는 작품들이 어떻게 평가됩니까?  졸속이다.  근시안적이다.  자기편의주의다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극이 이타적입니다.  지극히 포용적이요, 포괄적이며,  건설적(16 멸망치 않고)인 사랑입니다.

  

  그러한데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은 다름아닌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롬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오신 독생자를 믿으면,  죄악중에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 다고 말합니다(16). 


  영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처음 사람 아담은 영원토록 살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졌지만 죄로 말미암아 그 생명이 유한적, 일시적, 제한적인 생명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영원히 살 수 없었기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박탈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죄지은 이후 에덴 동산에 있는 생명 나무의 실과 따먹고 영생할까 하여 천사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차단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생명나무의 길이 그리스도의 오심과 희생과 부활로 인하여 죄된 우리 인생에게 열리게 되었는데,  그 길이 바로 예수님을 믿는 길입니다.  따라서 인생의 가장 근원적인 소망인 영생은 생명공학을 발전시키고, 유전공학을 발전시키는 과학적 방법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오신 그리스도를 믿고 중생함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으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구원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17).   본문에 기록된 구원은 아주 무서운 멸망의 위기 속에 빠진 자, 예를 들면 물에 빠져 죽어가는 자를 구출해 주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죄악된 불의의 삶 때문에 심판을 받아야될 운명적인 사람을 당신의 독생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불안과 죄책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리라). 

  우리는 매스컴을 통하여 종종 형사입건 된 사람들의 면면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수치에 못이겨 카메라 앞에 올바로 서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책(罪責 / 범죄의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가 부끄러운 일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만이 죄책과 부끄러움이 있습니까?  모든 사람은 양심이 살아날 때,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부딪힐 때나 주님 앞에 설때에 죄책과 부끄러움에 압도되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눅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책에서 벗어나며 또한 죄사함과 의롭다하심을 받고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으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심판을 받지 아니한다고 합니다(18).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17) 주 목적이 아니셨습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심판받을 사람들에게 용서와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용서와 사랑과 자비를 얻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는데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심판하시는 그리스도에 관해 기록하였는데,  그리스도의 말씀이 사람들을 심판하시며(요12: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하나님이 일체의 심판을 그리스도께 위임하셨다고 증거합니다(5:22 /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그리고 마지막 날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분명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는의로운 재판장으로 나타나실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딤후4:1, 8).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자비로운 용서와 구원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이 양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반응하는 인간의 태도에 따른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게 되기를 원하십니다(딤전2:4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리고 이 일을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히시게까지 하셨지만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무관심하여 불순종과 완악함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끝내 구원의 문을 막아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자비를 얻을 때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 보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내려질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도 기록되여 있습니다.  18절에 보시면 믿지 아니하는 자,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목적이 하나님의 사랑을 얻게하고, 구원을 얻게하고, 영생을 얻게하며, 심판에 이르지 않게하시기 위함이였는데, 만일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결과는 심판가운데 떨어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류는 아담의 후손으로 원죄와 자범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에 처해질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속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자연히 멸망과 정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 받은 상태입니다.  심판과 구원 사이에 그 어떠한 중간지대도 없습니다.   따라서 중립적인 선택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절대적으로 양자 택일의 문제인데, 본문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주님을 영접지 아니함으로 이미 심판가운데 떨어져 있다고 사도요한이 지적합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정죄되고, 심판 가운데 머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9절의 말씀이 잘 대변하여 줍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사도요한은 사람들이 심판 가운데 머물수 밖에 없는 주된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심판가운데 떨어진 이유는 사람들의 행위가 악하므로 어두움을 사랑하였기에 심판가운데 처해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어두움은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을 말하는 것으로 영적으로 이미 죽은 자를 말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의 빛을 회피하고, 미워하고, 때로는 적대하여 자기의 행위를 수리하거나, 반성하지 아니하고, 그 속에서 탐닉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말씀의 빛이 조명되어 질 때 항상 대적하여 왔고, 도리어 어두움을 조장하거나, 어두움을 적극적으로 권면하고, 어두운 일하는 자들을 부러워함으로 자기 죄의 세력을 확대해가는 어리석은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진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정죄당할 수 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빛을 미워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20).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어두움을 사랑한 나머지 빛을 미워하는 어리석은 행위를 저지릅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증거되어지는 것을 싫어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것 자체를 모독하는 빛의 대적자로 서게 됩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불가피함을 사도요한이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어두움에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어두움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빛을 미워하고 빛이 증거되어지면 자기의 죄가 노출되어지기에 애써 자기의 어리석음과 무지함을 은폐조작하는 무리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자기의 이러한 행위로 말미암아 심판에 나아간 것을 사도요한이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인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대적하는 것 차이에 얼마나 깊은 차이와 심연이 있는지 잘 대변하여 줍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주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과 영생과 정죄가운데 떨어지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