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15:1-13 약한 자의 하나님
로마서33 약한 자의 하나님 롬15:1-13.
세상은 강한 자를 중심으로 하여 살아갑니다. 기업의 구조나 정권의 구조가 그렇습니다. 대기업을 모기업으로 하여 그 밑에 수많은 협력업체들이 공생하면서 살아갑니다. 정치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정권을 진자 밑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은 그만큼 정권을 가진 자의 영향력이 막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경제력과 권력을 가지고 계속유지하기 위하여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살벌한 싸움을 오늘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이긴 자만 살아남는 냉엄한 정글의 법칙 또는 적자생존의 법칙과 같은 밀림지대를 연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연약한 자의 하나님입니다. 세상에서 실패하여 넘어지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영원한 도피성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에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갈대아 우르 자기의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착하여 사는 동안 심한 흉년이 들어 이방지역 애굽으로 도피하게 됩니다. 그곳에 도착하자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 사래와 그의 소유물(동산) 을 애굽의 왕 바로에게 빼앗깁니다. 가진 자의 폭력 앞에 무기력한 아브람은 아내와 그의 전 소유물을 담보로 하여 자기의 생명을 지키려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아내 사래를 빼앗기는 일에 속수무책 이였습니다. 이렇게 연약해진 아브람, 피할 곳 없고, 강한자의 횡포와 짓밟힘 앞에 무력한 아브람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망향의 한과 아내를 빼앗긴 상실의 고통을 깊이 느껴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약자의 설움입니다. 힘이 없는 자가 세상에서 받는 아픔입니다.
그러나 아브람에게는 그를 부르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권력의 실세인 애굽왕 바로, 그 당시 중동지역의 유일한 강자라고 할 수 있는 바로를 향하여 어떠한 조치를 취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연약하여 고통받는 아브라함과 사래를 위하여 바로와 그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십니다(창12:17).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도움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되찾고 빼앗긴 재물이 되리여 풍부하게 되어 무사하게 가나안 땅으로 귀향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연약한 자를 도우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바로 그러한 하나님이십니다.
신약시대에도 하나님의 약자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북쪽 성곽에는 양문이 있었습니다. 이 양문 곁에 베데스다1)라는 연못 주변에 자그마한 행각 다섯이 있었습니다. 그 다섯 행각에는 수많은 병자와 소경 그리고 절뚝발이와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있었습니다. 병자들이 그렇게 누워있었던 이유는 베데스다 연못에 가끔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되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많은 병자들 중에도 특별히 약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삼십팔 년이나 천사가 물을 움직일 때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그 누구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므로 인생의 반 이상을 병났기 위해 그곳에서 소비하였습니다. 얼마나 비정하고, 고통스러운 소외된 인생입니까? 병자들 중에도 가장 빈약하고, 힘이 없는 병자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곳을 주님이 방문하시고, 그를 주님이 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병이 오래된 줄 아시고, 그의 고통이 오래된 줄 아시고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때에 병자가 대답합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주님 나는 병을 낳고자 하여 베데스다 연못에 들어가려고 수많은 시간을 허비하였나이다. 그러나 내가 너무나 연약하고, 그리고 연약한 나를 도와주는 이 없으니 낳고자 하나 낳을 수가 없습니다. 삼십팔년 된 병자가 말한 것과 같이 베데스다 연못은 참으로 비정한 장소였습니다. 그곳은 힘이 센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비정한 장소였습니다. 그곳에 주님이 찾아와 연약한 자를 살피시고 말씀하시기를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연약함과 도울 자 없는 신세를 하소연하는 삼십팔년된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네 소외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라, 약육강식(弱肉强食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먹힘)에 멍든 네 심령에 새 소망과 용기를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때에 그 병자는 즉시로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갑니다. 회복의 길로 나아간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은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인 사람들과 같이 소외2)된 삶을 살아갑니다. 현대인들은 많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어 살아갑니다. 생존경쟁의 치열한 삶 때문에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각박하고, 분열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 중에 특별히 노동자들의 삶은 노동을 통해서 자기를 실현하지 못하고 육체적인 생존만을 위해 단지 다람쥐 쳇바퀴 달리듯이 달려야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즉 노동활동 자체로부터 그 얼마나 많은 소외를 경험합니까? 우리는 또 사회가 조직화되면서 능률과 생산성만 강조됨으로 인간의 진정한 가치는 도외시된 체 로봇처럼, 자동화된 공정의 기계처럼 되는 소외현상을 수없이 경험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사회구조의 병폐 속에서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실의에 빠지고, 인생을 비관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러한 사회구조의 병폐와 누적된 피로감이 어떠한 현상에서 여실히 드러납니까? 요사이 자살사이트를 통하여 만난 젊은이들이 동반 자살을 한다던가. 아니면 청부자살을 통하여 죽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반면에 소외된 삶과 정반대로 부유층들의 삶은 어떠합니까? 어떠한 고급술집에서는 화장실에 화장지가 없어 십만원짜리 수표를 가지고 뒤처리를 한다고 합니다. 하루 밤에도 수백수천만원의 술자리 파티가 열린다고 합니다. 부유층 자제들은 마약파티를 즐긴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금리에 허덕이고, 가계 살림을 걱정하면서 눈만 뜨면 돈걱정을 하는 판에 고급 백화점에서는 고급 의료들이 없어서 못 판다는 즐거운 비명을 지릅니다. 영광굴비와 같은 조기들은 열 마리에 일백오십만원에 판다고 합니다. 어떤 주부는 조기 세 마리가 일년치의 일용할 양식이라고 신문에 글을 올리는 것을 볼 때에 너무도 비정상적인 사회라는 사실에 경악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는 천민자본주의 사회라고 합니다.
왜이리 가난한자나 부유한 자가 함께 어울려 살지 못합니까? 그것은 강한 자의 독선이 이 사회를 좀먹은 결과입니다. 대기업의 이윤이 노동자에게 전가되지 못하고, 사회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짓누르기 때문입니다. 부가 올바로 분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사회 윤리가 실종 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회가 구원을 받으려면 오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약한 자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법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때만이 인간사회에 소망을 이야기 할 수 있고, 회복의 꿈을 가지고 단잠을 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적극적으로 전개해야될 주체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믿는 우리들이 먼저 나서야 합니다. 우리들도 똑같이 없는 자와 못가진자, 소외된 자를 향하여 무관심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해야 합니다. 왜입니까?3) 우리들도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에서 소외된 자들이였으나 예수님의 피흘리신 희생의 사랑으로 그 소외를 극복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래 구원 언약에서 소외된 자들이였습니다.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이였습니다. 세상에서 그 어떠한 소망도 없던 자들이였고, 하나님도 없던 자들이였습니다. 이렇게 생명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을 주님은 당신의 몸을 십자가에 던지사 그러한 소외의 원인들을 사랑의 불로 태워버리셨습니다. 이 사랑을 입었기에 우리가 이 사회 속에서 소외되고 연약해져 지쳐있는 무리들을 포용하고, 초청하여 치료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사도바울이 어떻게 말합니까? 1절과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세상은 연약한 자를 잡아먹고, 남을 죽여야 살아남습니다. 참으로 비정한 사회입니다. 이러한 일은 동물의 사회 속에서만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인데 인간 사회 속에서 비일비재한 일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그럴 수밖에 없다 치더라도 오늘 우리 교회는 어떠합니까? 자본주의 사회에 세뇌 되여 교회도 몸집을 키우면 다입니다. 교회도 적자생존의 경쟁 속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것이 서글픈 교회의 현주소입니다. 하지만 오늘 사도바울은 어떠한 이야기를 합니까?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합니다. 여러분 중에 부유한 자4)가 있습니까? 가난한 자를 생각하십시오. 육신적으로 강합니까? 장애자들과 노약자들 앞에 겸허해야 합니다. 믿음이 좋습니까? 연약한 믿음의 소유자들을 끌어 않아야 합니다. 많이 배웠습니까? 아니 가방 끈이 남들보다 깁니까? 가방끈 짧은 사람을 무시하지 말고, 사회와 국가 앞에 더큰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무능하여 길에서 폐품을 줍는 사람들 앞에서 미안한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들 앞에 머리 숙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부유한 자가, 강한 자가, 배운 자들이, 믿음이 좋은 자들이 능력이 있는 자들은 오늘 하나님께서 그러한 기회를 주셨다는 사실 앞에 겸손하시고, 그 소질을 가지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씀이 오늘 1절 말씀의 내용입니다. 만일 그러한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자기만 기쁘게 하면 하나님은 대적하실 것입니다5).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언제든지 강자 편이 아니셨고 약자편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어진 것을 가지고 이웃을 기쁘게 하면 어떠한 일이 나타납니까? 선이 이루어지고, 덕도 세워집니다. 다시 말씀드려 사회의 기강이 확립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때에 올바른 복지사회로 한 걸음 내딛딛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허무한 사회를 꿈꾸지 않습니다. 이룰 수 없고 현실을 무시한 이상사회인 유토피아, 무릉도원을 꿈꾸지 않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합니다. 그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습니다6). 그 나라가 우리를 통하여 밖으로 나타나면 됩니다. 표출되면 됩니다.
그렇다면 약자와 강한 자가 분열되지 않고 어우러질 수 있는 그러한 공동체는 어떻게 할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본받아 같은 뜻으로 하나될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사실 때 결코 당신의 능력을 다른 사람들에 보이기 위해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보답을 위해서 그러한 능력을 남용하시지도 않았고, 당신의 능력을 배경 삼아 고위공직자들이나 정권의 실세들과 함께 어울리지도 않으셨습니다. 즉 당신의 능력을 미끼로 하여 당신을 기쁘게 하지 않았습니다. 되리여 그 능력을 가지고 주위에는 민초들을 돌아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주변에는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하고, 절박한 사회적인 약자와 소외계층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만남으로 약자의 설움을 떨쳐버리고 참된 소망의 빛을 예수님에게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파격적인 만남을 보고 그 당시에 권력과 상류지배계층을 이루고 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질시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비아냥댔습니다. 그때에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아름다운 인격체로 거듭날 수 있으며, 그러한 인격체가 모인 곳에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회복된 공동체가 설립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이러한 교회를 꿈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당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빌2:5-8).
그러한 예수님을 오늘 사도바울은 어떠한 분으로 표현합니까?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주님은 당신에게 있는 능력을 당신을 위해 사용하시지 않으시고 약한 자들을 치료하시는 일에, 병든 심령을 회복시키기 위해, 상처받은 심령을 회복시키기 위해 사용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을 우리가 본 받을 때 위대한 선지자들이 꿈꾸었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요, 사도바울이 바랬던 공동체의 이상이 이 땅에 뿌리내리는 것이며, 우리 교회가 주님의 이러한 자세를 본 받을 때 교회역사에 길이 남는 교회가 되고 자타가 인정하는 쓰임 받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이상은 이러한 것입니다. 강한 교회가 우리 교회의 이상이 아닙니다. 가진 것은 돈밖에 없어 화려하게 치장되고, 비대하여 도시 속에 무용지물 하게 서 있는 무기력한 교회가 우리 교회의 이상이 아닙니다. 반면에 약하디 약하여 언제나 도움의 손길만을 간절히 구하는 그러한 미성숙한 교회가 우리 교회의 이상이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무감각하여 사회를 향하여 정권을 향하여 숨을 죽이는 그러한 교회가 우리 교회의 이상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정당하게 부여받은 강한 자나, 인생이란 큰 경기장에서 기회를 잃은 약한 자가 같이 어울려 하나 되여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교회가 우리 교회의 이상입니다. 가진자나 못가진자가 같이 모여 형제와 자매의 정을 나눌 수 있는 그러한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같이 이러한 교회를 만들어 나아갑시다.
여러분 저는 한 집안에 막일을 하는 형제와 과학기술원에서 박사로 일하는 형제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간에 욕하거나 험담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이유는? 피를 나눈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형제애로 뭉친다면 교회 안에 위화감이란 독초가 자랄 수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이러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서로 돕고, 나누어주는 처음교회의 이상이 바로 우리교회의 이상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룸에 있어서 난관이 있을 수 있습니다. 3절의 중반절을 주목하십시다.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고 기록되여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세상에서는 감히 이러한 사회를 꿈꿀 수 없습니다. 여러분 시장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경쟁에서 살아남으면 존재하고, 경쟁에서 소외되면 존재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세계는 거대자본이 중심이 되어 세상을 움직입니다. 모든 조직이 돈의 막대한 영향력과 힘에 의하여 살고 죽습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오늘 성경에서 말하는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약점을 감당한다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야말로 강건너 불이지, 세상에서는 거론할 가치도 없는 약자들의 자기합리화 정도밖에는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은 약자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할 가치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거대한 난관에 부딪힐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인내로 이러한 난관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은 우리가 꿈꾸는 공동체적 이상에 대하여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꿈꾸는 공동체적 이상에 아낌없는 성원과 격려를 보냅니다. 또한 그러한 이상을 가진 백성들을 하나님은 하나로 규합(糾合)하시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을 본문에서 어떻게 묘사합니까? 4절에서부터 6절을 주목합시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격려)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기를 원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뜻이 같게 하여 주사 그리스도를 본받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곳에 진정한 하나됨의 어울림, 한 마음과 한 입의 하모니가 있는 것입니다. 그 어울림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합창단을 예로 들어 생각해 봅시다. 성가합창단의 구성원을 살펴보면 소프라노와 알토 그리고 테너와 베이스와 같이 높은 음과 낮은 음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룹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적절하게 어루러지며 하나될 때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약자를 위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곳이 진정 실패한 자들의 도피성, 약자들의 도피성이 건축되는 곳입니다.
결론하여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이유로 사도바울 자신도 약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약한 것을 자랑7)하였습니다. 약한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약한 그곳에 하나님의 능력이 역동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것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강한 자가 마땅히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을 감당해 주셨으니 우리도 의당히 형제의 약점을 감당해 주어야 합니다. 세파에 시달리고, 경제적인 강자에게 짓밟힌 무리들을 교회에서 포용해야 합니다. 생명에 애착을 잃어버리고, 삶의 의욕을 상실한 자들을 우리 교회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천민자본주의에 상처 입은 연약한 자들을 우리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으나 우리의 구원을 위해 종의 몸,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사실에 오늘 이 병든 사회를 치유할 수 있는 묘책이 담겨져 있습니다. 단지 이론으로 무장하지 아니하고 현장(Field)에 나아가 그 성육신의 사랑, 인간의 약점을 담당하시는 사랑을 몸소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그 때에 다시금 교회의 가치가 새로워지고, 교회가 잃었던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우리 개인이 하기 힘듭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서로 하나되어질 때 큰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되고, 믿는 자들이 하나 되어서 아름다운 구성원을 이룰 때 가능합니다.
1) Βηθεσδά 은혜의 집 또는 올리브의 집이라는 뜻. 교회의 축소판, 세상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음.
2) 소외개념 : 사회관계 혹은 전체적인 사회,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인간간의 관계가 사물간의 관계로 나타나고 인간의 물질적 정신적 활동을 통해 산출된 생산물, 사회적 관계, 제도 및 이데올로기가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는 낯선 힘으로써 인간과 대립할 경우 이 관계 및 전체상황을 소외라 한다.
3) 엡2:11-13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 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4) 욥29:12 내가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줄 자 없는 고아를 건졌음이라, 13. 과부의 마음이 나로 인하여 기뻐노래하였었느니라. 15. 나는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졸부가 되지 말고 존경받는 부자가 되어야 함.
5) 시101:5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로다. 잠21:24 무례하고 교만한 자를 이름하여 망령된 자라 하나니 이는 넘치는 교만으로 행함이니라. 벧전5:5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눅17:20-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7) 고후11:29-30.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고후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