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요11:17-44 부활과 생명의 주

아론33 2009. 3. 17. 20:29

  JOHN37  요11:17-44  부활과 생명의 주


  성경에서 주장하는 진리는 세상의 지식체계와 비교하여 보면 복잡하거나 난해한 진리가 아닙니다.   본문에서도 주님은 너무도 간단하고 명료한 진리를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 진리의 내용은 요한복음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바 부활의 생명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환경이 파괴되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관심사는 생명의 안전에 대한 문제입니다.   현재 지구촌은 오존층의 파괴로 인한 자외선의 노출과 환경호르몬의 분비로 인한 생태계의 교란 등은 인간의 생명에까지 위협을 초래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구촌에 뜨거운 이슈로 계속 제기되고 있는 환경의 문제는 결국 생명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입니다.   이유는 사람은 누구나 안전하고, 유복한 삶을 살아야할 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권리가 환경의 파괴로 침해될 때 인류는 진정으로 불행과 슬픔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도 한 젊은 친구의 불행과 슬픔을 우리는 목격할 수 있습니다.  이 친구의 이름은 나사로입니다.  나사로는 젊은 나이에 회복할 수 없는 질병에 시달리다가 꽃다운 나이에 죽음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그 가정에 커다란 슬픔과 좌절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집안에 대들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을 하직하였으니 그 가정의 슬픔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와 마르다의 슬픔은 참으로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이였습니다.   17절에서 19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 베 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  19.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의 죽음을 사람들이 듣고는 너나할것없이 그 집을 찾아와 위문하였습니다.   한 집안에 애경사가 있을 때 찾아주는 것과 같이 훌륭한 일이 없습니다.  어떠한 사람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그 사람의 애경사때 찾아오는 인원을 통하여 가늠하여 본다고 합니다.    특히 상가집에 우리 이웃들이 찾아주는 것은 덕스러운 일들 중에 하나가 됩니다.   상가집에 사람이 없으면 그것과 같이 쓸쓸함과 황량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에 사람이 없는 것보다 슬픈 일에 사람이 없는 것이 더욱 고통스러운 일이기에 슬픔을 나누는 것은 큰 덕을 쌓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나사로의 주검은 많은 유대인들의 위문이 있었다고 기록된 것을 볼 때 나사로는 평소에 이웃과 좋은 관계 가운데 살지 않았나 추측하여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나사로의 가정은 평소에 주님과도 각별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3).    그러하기에 나사로의 생명이 위독할 때 그 누이들이 맨 먼저 주님께 치료의 손길을 간곡하게 부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리아와 마르다의 바램과는 달리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고(6),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 되어서야 겨우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17).   베다니에 도착하자마자 주님을 맞이한 것은 마르다였습니다.  예수님과 마르다와의 대화 가운데는 묘한 교차적 감정을 우리가 대할 수 있습니다.  마르다의 대화 가운데서는 나사로의 죽음을 두고 예수님께 좀 서운하고 야속한 감정이 드러납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대화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지배적 감정은 염려와 근심의 기색을 찾을 수 없고 되리여 생명의 소망으로 가득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어야할 중심적인 메시지가 바로 주님의 그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강조하시고 계시는 그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하겠습니다.   20절에서 27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20.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24.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오늘 예수님은 나사로의 가정에 찾아오시는 분 중에 가장 귀한 분(VIP)입니다.   그러하기에 마르다는 주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가서 주님을 영접합니다(20).   도시생활에서는 이러한 영접을 우리가 경험하기 쉽지 않지만 시골에서 생활하셨던 분이라면 이러한 영접에 대하여 좀 이해하실 것입니다.    시골에서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어떻게 합니까?   집 마당에 무성하게 자랐던 잡초를 제거하고 빗자루를 가지고 먼지를 날리면서 쓸고, 걸레로 때 끼었던 마루와 방 구석구석을 닦고 난 후, 동네의 어귀까지 마중을 나갑니다.   이런 모습이 정적인 동양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마르다의 심정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이 있었기에 그러할 정신도 없이 주님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때 같으면 음식을 준비하고,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여러 모양으로 분주하였겠으나 오늘은 그러한 일을 모두 마다하고서는 동네의 어귀까지 주님을 직접 찾아가 영접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첫마디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21-22)” 

  예전 같으면 큰 기쁨과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영접하였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사정인지라 마르다의 대화 가운데서는 어딘지 모르게 주님과의 만남 가운데 서먹서먹한 감정과 서운한 감정이 진하게 배여 있습니다.    “주님이 여기 계셨더면 나사로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인데,  어찌 빨리오시지 않았습니까?  주님이 계셔서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구하였다면 내 오라비가 완치되었을 것을 어찌 그렇게 야속한 발걸음으로 이제 오시는 겁니까?”라고 슬픔과 원망과 야속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주님은 슬픔과 절망에 빠진 마르다에게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하십니다.   그 메시지는 암흑가운데 빛나는 한줄기 빛과 같은 것이였고,  황량한 사막에 생명의 오아시스와 같은 메시지였습니다.  그 메시지는 “네 오라비가 살리라(23)”는 말씀입니다.    나사로가 다시 살수 있다는 말씀은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로 마르다를 향한 교훈과 위로의 메시지입니다.    지금 마르다의 심중을 지배하고 있는 슬픔과 절망은 믿는 자로서 타당한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둘째로 나사로가 다시 살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당신을 믿는 자에게 죽음이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재차 설명하여 주십니다.  즉 나사로가 살아날 것이라는 단서를 다음의 25절과 26절에서 밝히고 계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참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은 참 부활이 되십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생명이 머무는 곳에 사망이 정복됩니다.   사망이 정복되기에 슬픔을 극복할 수 있고,  실패를 경험하여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됩니다.    진정으로 신앙생활하는 우리가 이러한 인생의 역전을 경험하려면 요구되어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믿음입니다.   믿음이 생명의 문을 여는 힘입니다.  믿음이 생명의 물줄기를 터놓는 길입니다.  그러하기에 오늘 마르다에게 주님이 네가 믿느냐? 고 반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가져다주는 현실적인 능력을 주님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다.  

  이 말씀을 마르다의 입장에서 들어보면 지극히 원론적인 말씀으로 들려질 수 있습니다.   마치 어르신들이 어린아이를 불러놓고 타이르기를 “착하게 살아야 되,  공부 잘해야 되,  차 조심해”와 같이 들릴 수 있는 원론적인 말씀입니다.   어르신들의 이러한 말씀 앞에 어린이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또 그 소리 이제는 지긋지긋해”정도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으로 뒤집어 보면 그러한 교훈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훈도인지 모릅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착하게 사는 것과, 공부 열심히 하는 것과, 차를 조심하는 것이 그 얼마나 중요합니까? 

  오늘 주님의 생명의 말씀 앞에 마르다는 어르신들의 교훈 앞에 어린이들이 반응하듯이 귓가에 스쳐지내치고 있습니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는 말씀 앞에 마르다는 암 그렇죠 마지막 날에는 부활하겠지요!(24)  그의 마음이 열리지 않자 주님은 “내가 부활이다,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니 네가 믿어야 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마지못해 그 말씀에 동조하고 마리아에게 돌아가 주님이 오신 사실을 알립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어떠한 감정에 지배를 받는지 이제 27절에서부터 33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8.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마르다는 주님의 말씀에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마지못해 대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에 특별한 그 무엇을 발견하지 못하자 그 형제 마리아에게 찾아가 주님이 부르신다는 사실을 전합니다(28).  이 사실을 접한 마리아 역시 주님에게 급히 나아갑니다(29).  그리고 주님의 발 앞에 엎드리어 말하기를 “주님이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 라고 울부짖으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를 따라왔던 유대인들도 마리아의 울부짖는 것을 보고 함께 울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초상집에 가보면 곡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곡할 때 한 사람의 울음소리가 진지해지면 친지의 문상객들의 곡하는 소리가 함께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도 사람이 죽으면 곡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우리보다 한 술 더떠서 애곡꾼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돈을 받고 고용된 사람들이였습니다.  본문에 마리아를 따라와 마리아의 곡소리가 터지자 함께 우는 무리들이 바로 애곡꾼이 아닌가 주석가들이 해석합니다. 

  어찌 되었든 오늘 주님을 중심으로 마르다와 마리아가 보이는 격정어린 슬픔의 감정은 믿는 자로서 합당한 모습이 아닙니다.   생명의 주요, 부활의 주가 되시는 주님 앞에서 슬픔을 통제하지 못하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입니까?  이에 더하여 주님을 지금 원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적어도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의 지도에 대하여 깊은 신뢰를 보였던 마리아 마저 그 슬픈 감정을 주님 앞에 억누르지 못하고 절망 가운데 넘어져 있으니 주님의 심정이 어떠하였겠습니까?  본문에서 주님의 심정이 통분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이러한 표현은 화가 나서 감정이 흔들릴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오시여서 나사로가 다시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가 예수님을 생명의 주요, 부활의 주로 믿었기에 주님이 함께 하시면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는데도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아니하고 도리어 오늘 마리아는 많은 유대인들과 함께 목놓아 울고 있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러하니 주님께서 통분히 여기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공부못하는 아이를 싫어하는 것과 같이 가정에서 우리 부모들이 아이들이 공부하지 않은 것을 싦어하시는 것과 같이 우리 주님은 믿음이 없어 혼돈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싫어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러한 그들을 향하여 민방히 여기셨다고 기록합니다(33).  이 말씀은 믿음이 없어 나약해진 마르다와 마리아는 물론 주변의 사람들을 향한 애정이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주님의 보석과 같은 눈물을 자아내게 하였고,  이제 나사로의 죽음을 몰아내는 역사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게됩니다.  34절부터 39절까지의 말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주님은 이제 베다니에 오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리고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진정한 이유를 보이시기 위하여 결의에 찬 발걸음을 옮기십니다.  곧 나사로의 주검이 안치된 돌무덤을 향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무덤은 일반적으로 굴로 되어있고, 그 문을 돌로 막는 것이 습관이였습니다.   그리고 그 무덤을 향하여 가는 발걸음 중에도 주변 유대인들로부터 불신의 소리는 여전히 높기만 합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나사로는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37)”.   주님은 그러한 불신의 소리에 유감을 보이십니다(38).  그리고 이제 무덤에 다다르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이 순간 마르다 마저 그들의 불신의 소리에 감염 되여 주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소리를 늘어놓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 말은 이렇습니다. “주님 이미 사흘 전에 죽은 나사로의 무덤 문을 열어 무엇을 하시려고 하나이까?   굴 입구에서도 부패한 냄새가 나는데 돌을 옮겨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빈정대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르다의 반응 앞에 믿음이 없음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곡히 기도하신 연후에 나사로를 큰 소리로 부르심으로 살려내십니다.   이제 40절에서 44절의 말씀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아니하였느냐 하신 대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새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주님은 마르다의 불신을 책망하십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아니하였느냐(40)”  어찌 그리 믿음에 서지 못하느냐?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불신으로 조장된 심성들에게 믿음을 자아내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믿음의 중심은 오늘 부활과 생명입니다.  그 부활과 생명은 바로 주님께서 생명의 주가 되심을 믿을 때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나사로는 물론 그의 누이들 그리고 그 가정을 둘러싸고 있는 문상객들은 놀라운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기도하신 이후에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렇게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왔다고 기록합니다.    이러한 광경을 우리 믿는 모두는 반드시 경험할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주님이 사망을 이 땅에서 몰아내실 때 믿는 자들은 모두 나사로와 같이 일어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반드시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이 깃들어 있는 자들만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병들어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자 초상집은 잔치집으로 변합니다.    울음은 금새 웃음과 화기애애한 주님의 이야기로 꽃을 피웁니다.   얼마나 큰 반전을 경험하였겠습니까?   이러한 반전은 주님을 믿을 때 가능합니다.  인생의 역전은 오직 주님을 믿음으로 영접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돌무덤과 같이 닫혀진 마음의 문을 여시고 주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생명의 복음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사실을 믿으면 우리도 마르다와 마리아의 가정과 같이 주님의 역사를 경험하게될 것입니다.  이제까지 슬픔과 좌절이 우리의 감정을 지배하였습니까?   주님을 믿으면 슬픔은 기쁨으로 반전되여 나타납니다.  절망과 패배주의는 소망과 승리할 수 있다는 성취감으로 바뀔 것입니다.   이러한 감정은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원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음으로 우리 삶에 인생의 역전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는 믿어야 삽니다.  이 평범한 진리는 우리 인생을 지배하는 위대한 교훈입니다.   믿을 때 부활과 생명을 경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