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9:13-34 소경되었던 자의 담대한 믿음
JOHN31 요9:13-34 소경되었던 자의 담대한 믿음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주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눈을 뜨게 되었던 소경이 유대공동체 사회에서 내어쫓기는 것을 불사하고 담대히 주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참된 선지자임을 고백하는 장면을 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소경 되었던 자는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죄인으로 몰아가자 주님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분으로 변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을 통하여 우리도 소경되었던 자의 담대한 믿음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러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그 어떠한 대가라도 치루어내겠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이미 주님께서 나를 위해 하늘의 영광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시어 생명의 빛을 조명하셨으니 나 또한 주님을 위해서라면 나의 기득권이, 내가 가지고 있는 행복이 주님을 따름에 장애가 된다면 의당히 그것을 포기할 수 있는 신앙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소경되었던 자의 주변 사람들은 반강제적으로 그를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찾아갑니다. 소경되었던 자에게 있어서 그 길은 참으로 무겁고, 힘든 길이였습니다. 이유는 그가 안식일에 치료받아 온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13절과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3. 저희가 전에 소경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소경을 치료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치료하시면서 진흙을 이기신 것은 노동행위 그 자체였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이러한 행위는 율법의 정신에 충실하지 아니하고, 문자에 생명을 걸었던 바리새인들에게는 위법행위였습니다. 그 시대에 유대 사회를 좌지우지하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의식을 중시하는 외식주의 자들이였습니다. 반면에 주님께서는 율법의 정신인 참 사랑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시여 실천하시는 분이셨기에 똑같은 말씀을 따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과 끊임없이, 사사건건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안식일에도 선을 행하는 것과 생명을 구하는 일을 게울리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1). 또 주님은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가르침을 친히 본장을 통하여 실천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바리새인들의 기득권을 흔드는 일로 용납할 수 없게되자 그들은 소경되었던 자를 중앙에 세우고 일의 자초지종을 되묻습니다. 15절부터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5.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가로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16.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17. 전에 소경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 대.
오늘 바리새인들과 많은 사람들은 주님과 소경되었던 사람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여주거나, 환영하지는 못할 망정 그를 치료하신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시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소경되었던 자를 위협하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소경되었던 자는 일생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의 싸늘하고, 적대적인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지경에도 소경되었던 사람은 자신을 치료하신 주님을 배반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선지자라고 옹호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주님을 하나님의 보냄을 받지 않은 자라고 하는데 반하여 소경되었던 자는 주님을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선지자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주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우리나 지금 주님을 대적하고, 소경되었던 자를 협박하고, 위협하는 바리새인들조차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주님2)을 따를 때 그 때에 비로소 율법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롬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믿지 아니하고 율법을 따를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믿음이 없이 율법을 지키려하니 말없이 부산에서 서울까지 달려가겠다는 말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소경되었던 자의 신앙이 얼마나 대조적인 신앙입니까? 바리새인들은 주님이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반하여 소경되었던 자는 바리새인들만이 운집한 광장에서 주님을 하나님의 보내심을 입은 선지자라고 주장하니 본이 되는 신앙이 아닙니까? 우리도 이러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에 묻혀서 살아갈 것이 아니라 돋보이는 신앙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본래 바리새인들의 의도는 소경되었던 자의 기를 꺽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주님의 치료사건을 축소하거나 은폐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그를 심문하였으나 의도대로 되지 않자 이제 그의 부모를 불러들여 주님께 향한 불신을 조장하고, 자기들의 기득권을 수호하려는 무모한 시도를 감행합니다. 18절부터 23절까지의 말씀의 유의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18.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19.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20.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23.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 하였더라.
분명 바리새인들은 그 시대의 기득권이였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기득권이라 함을 그 시대에 힘의 중심 세력이란 말입니다. 우리 사회의 중심 세력을 혹자가 말하기를 인너서클이라고 합니다. 국회에 세 번 당선된 삼선 의원이라도 인너서클에 들지 않으면 아무런 힘을 쓰지못한다고 합니다. 분명 시대의 중심 세력이 있는 듯 합니다. 2000년 전 중동지역에 힘의 중심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본문이 밝히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소경되었던 자의 치료 사실을 믿을 수 없었고, 설령 치료되었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은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힘의 중심이 급격히 예수님에게 옮겨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누구든지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메시야로 인정하고, 고백하여 그의 제자되는 자들은 출교하기로 결의하였던 것입니다.
그 시대에 출교를 당하면 회당에 들어갈 수 없고, 이스라엘의 신앙공동체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또한 사회적 경제적인 제재를 받는다고 합니다. 더욱더 비참한 것은 문둥병에 걸린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2미터 이내에 접근이 금지되어 있었고, 심지어는 그가 죽어도 애곡하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합니다. 그 시대에 출교를 당하면 가혹한 삶이 가해지기에 부모들은 확신한 것(아들, 소경으로 난 것)만을 시인하고 어떻게 보고,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에 대하여는 의도적으로 답을 회피하고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보라는 말로 본질적인 답을 회피합니다. 상황적으로 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의도한 바대로 재판을 이끌지 못하자 다시금 소경되었던 자를 불러 재차 심문합니다. 24절부터 29절까지를 유의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24. 이에 저희가 소경되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25.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26.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27. 대답하되 내기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28.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29.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바리새인들은 부모를 참고인 자격으로 불러 예수님의 치유사실을 축소하고, 일을 잘못된 것으로 조작하려 하였으나 의도대로 되지 않자 이제 재차 소경되었던 자를 불러 준엄한 말로 그를 협박합니다. “24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이 말은 본래 히브리인들 사이에서 죄지은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자백할 것을 촉구하는 말입니다. 여호수아 7장을 보면 가나안 전쟁에서 하나님께 드릴 노획물을 아간이 몰래 빼어 돌려 도적하고 사기3)하여 이스라엘이 비참하게 패하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직도 가나안 전쟁을 치루려면 많은 과정이 남았는데 전쟁의 초기에 이스라엘이 패하니 그 좌절과 슬픔은 큰 것이였습니다. 낙심하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도적한 자를 색출하여 처형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도적한 자는 다름 아닌 유다 지파의 아간이였습니다. 아간을 앞에 세워놓고 여호수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들아 청하노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 행한 일을 내게 고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수7:19)”고 최후통첩을 보냅니다. 그리고 그의 자백을 받아낸 후에 그를 아골 골짜기로 가서 그를 돌로 쳐죽이고, 불사릅니다.
본문에 바리새인들이 소경되었던 자에게 던지 한 마디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고 한 말은 최후통첩의 말이기도 합니다. “너는 많은 회중 앞에서 진실을 말하라 예수 그 사람이 죄인이다. 이 사실을 인정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에게 가해지는 형벌은 참으로 말로 형용키 어려울 것이다”라는 어조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소경되었던 자는 어떻게 말합니까? 분명하고 당돌하게 말합니다.
“25.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죄인이 아닙니다(히4:15)4). 예수님이 죄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혹한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분명한 것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되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 앞에 선언하고 맙니다. 이 말에 바리새인들은 격분하여 원점으로 돌아가서 그 사람이 그 죄인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26)고 되묻습니다. 이 말에 소경되었던 자가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고 불붙는 곳에 기름을 붓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고 말하면서 모세의 우위성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미 모세도 주님을 예언한 선지자였습니다(눅24:27, 44,45)5). 결과적으로 바리새인들은 소경되었던 자의 기세를 짓누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소경되었던 사람은 자기가 한 이야기를 종합하여 바리새인들의 공회 앞에서 최후진술을 합니다. 30절부터 34절의 말씀을 유의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30.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 도다 31.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2.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33.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며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34.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소경되었던 자의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은 진정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진정 죄인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눈을 뜨게 하신 일은 전무후무한 일로 정작 세상의 빛이요, 생명의 빛이 되십니다. 이렇게 주장하자 바리새인들은 그를 좇아내면서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난 주제에 우리를 가르치려하느냐고 구박하여 보냅니다. 만일 그 당시에 유대가 로마의 속국이 아니였다면 그 소경되었던 자는 죽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행할 수 있는 가장 큰 처벌로서 그를 내어 쫓아보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소경되었던 자의 믿음을 통하여 그 믿음이 담대함을 바라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준 믿음은 큰 희생을 치루고 주신 선물입니다. 이 선물을 지키기 위하여 그 어떠한 대가도 치루겠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가지고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이미 담대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히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믿음에 담대함과 용의주도한 결단력이 없다면 세상에서 패하고 말것입니다. 반대로 믿음에 담력과 담대함을 갖는 다면 큰 상급이 예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히10: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1). 눅6:9,10 /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10.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11.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의논하니라.
2). 갈4:4-5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 수7:10-15 11.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12.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당치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자기도 바친 것이 됨이라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4). 히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5). 눅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